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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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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아도취 형 마스터링의 정의 및 배경

'자아도취 형 마스터링'이란, '마스터가 자신의 세계관과 캠페인 테마, 자신의 개인적 로망 성취를 위해 플레이어들의 모든 동기와 행위를 통제하며 자신의 의도 대로 플레이 전반의 흐름을 독점하는 행위'로 정의될 수 있다.

한국에서의 RPG 플레이 관행은 90년대 초반 이래로 내내 '대결과 승리'라는 컨셉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다. '낯선 환경에서의 모험과 적대 요소의 전투를 통한 배제'를 중심으로 하는 D&D가 가장 대중적인 룰이라는 이유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본질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마스터는 플레이어들의 앞에 함정을 깔고 몬스터를 배치하는 역할이며 플레이어는 마스터의 음모와 안배-_-를 돌파하고 시나리오를 클리어해 경험치와 템을 챙기는 역할'이라는 보다 원형적인 인식이 RPG 참가자들의 의식 기저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합당한 해석이다.

물론 대부분의 룰북에도 '마스터와 플레이어는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다'라고 명시되어 있으며, 저러한 관행은 유독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대립적인 관계 형성이 마스터로 하여금 보다 폐쇄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캠페인을 구성하게 만드는 동기가 된다는 것이다. 대립 구도에 매몰되어 있는 마스터가 취하는 첫번째 게이밍적 수단은 시나리오 상에서 갖은 소도구들을 동원해 철저하게 플레이어들을 기만하고자 하는 것이다-'캐릭터'가 대상이 아니다. '플레이어'가 대상이다-. 그리고 플레이어들이 자신의 안배를 파악하고 '시나리오 클리어'에 성공한다면 마지못해 결과에 승복하고는 돈과 경험치를 제공한다. 그리고는 다음부터는 '자신의 승리'를 위하여 보다 더 까다로운 트릭을 동원하고 심리전에 힘을 쏟는다. 그러나 이 과정을 거치며 마스터와 플레이어들은 서로의 전략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게임 외적인 교류가 점차 적어지게 되고, 그를 통해 불만과 갈등이 속으로 쌓여 가게 된다. 그리고는 그게 어느 임계점에 달하면 폭발하고, 팀이 깨지게 된다. 물론 그러한 갈등과 대립 자체에서 재미를 느끼는 경우도 있으며, 모든 참가자들이 그렇다면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이 과정을 어떻게든 극복한 마스터 앞에 도사리고 있는 두번째, 그리고 가장 큰 함정이 바로 자아도취다. 그는 이제는 더 이상 세션 한번 한번, 시나리오 하나 하나에 있어서 일일이 플레이어들과 부딪치고 말다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자신이 플레이를 통해 얻고자 하는 기쁨이나 만족감이 어떤 성질의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그를 성취하기 위한 큰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 있어서, 다른 플레이어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나 지향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2)자아도취 형 마스터링의 일반적인 징후

자아도취 형 마스터링의 첫번째 징후는 캠페인의 향후 진행과 세부 설정을 모두 자신이 통제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마치 멀티 엔딩 방식의 어드벤처 게임이나 사운드 노벨의 시나리오를 짜듯이 캠페인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흐름을 사전에 짜놓고서는 중간 중간에 '이 국면에서 플레이어들이 어떤 플래그를 성립시키면 이 루트가 열린다'는 식의 분기를 설정해 둔다. 그리고는 각 플래그들이 저마다 세심하게 얽혀 상호작용하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이 부분의 핵심은 '각각의 플래그들의 상호작용'이다. 사전에 계산 범주에 들어 있지 않은 플레이어들의 욕구나 지향에 어떻게 반응할 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두번째 징후는 엔딩을 미리 내부적으로 확정해 두는 것이다. 그는 분기를 설정하고 플래그들의 상호 작동 상태를 꼼꼼히 점검하여 노멀 엔딩1, 노멀 엔딩2, 트루 엔딩, 해피 엔딩, 배드 엔딩1, 배드 엔딩2, 배드 엔딩3이라는 식으로 캠페인의 결말을 미리 예정해 둔다. 그리고 그 엔딩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건 마스터의 미학을 충족시키고 로망을 달성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어떤 마스터들은 일부러 자신의 취향과는 동떨어진 형태의 엔딩을 한 두개 정도 정해 놓고는 '나는 관대한 마스터이기에 내 취향이 아닌 이런 종류의 엔딩도 구상해 놨다'고 주장하곤 한다. 하지만 역시 거기에는 플레이어들이 저마다 갖고 있는 욕구나 지향성, 플레이를 진행해 오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새로 생겨나는 맥락들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되어 있지 않다.

세번째 징후는 게임 외적인, 마스터의 개인적 성향에 따른 징후다. 대체적으로 이러한 자아도취 형 스타일로 캠페인을 운영하는 마스터는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경험 많고 숙련된 마스터인 경우가 많다. 자아도취 형 마스터링은 그 정의 상 상당히 정교한 서사 구성 능력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플레이어들이 '사실은 마스터의 안배에 따라 몇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골랐을 뿐이지만 마치 자신의 의지로 앞 길을 개척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교묘한 포장 능력도 더불어 필요하다. 이 부분이 부족하면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의 욕구나 지향, 로망에 대해서는 아무 배려도 없이 그저 자기 로망 충족에만 관심있는 마스터에게 대상화, 타자화 당했다는 느낌을 받고 불만을 표하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그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 하지만 그 과정에 있어서 이기적이며 다른 참가자들의 의향에 무관심한 사람은 높은 확률로 자아도취 형 마스터링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3)자아도취 형 마스터링의 폐해

이 방식의 가장 큰 폐해는, 앞에서도 몇 번이나 언급했던 바와 같이 하나부터 열까지 '마스터에 의한, 마스터를 위한, 마스터의' 게임이 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럴 바엔 차라리 혼자 소설을 쓰는 게 더 낫다. 하지만 이 방식을 취하는 마스터들이 굳이 RPG를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과 얽히는 과정을 거쳐 결국 자신의 로망을 달성해 내는 극적인 무언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그 과정 전반에 마지막의 자기만족을 위한 수많은 안배와 배후 조정이 있었음에도-. 자아도취 형 마스터링은, 일종의 세련된 자기기만이기도 하다.

두번째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는 게임에서는 플레이어들이 피로를 심하게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RPG를 함에 있어서, 마스터는 의도하지 않은 지나가던 NPC A와의 교류라거나 다른 PC들과의 관계에 따라서 플레이 중에 새로운 가능성과 방향성이 부단히 생겨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을 취하는 마스터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통제에 속하지 않는 맥락들의 발생 가능성을 최소화시키고자 하며, 생겨나더라도 '이레귤러 팩터'로 규정하고는 묵살해 버린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스터가 제공한 레일 위만을 달려야 한다는 인식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자신이 무엇을 하건 이 세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이 상황이 악화되면 플레이어는 서사의 진행 전반에 영향력을 갖고자 하는 것, 이른바 서술권에 대해 아예 포기하고는 전투에서의 승리 등 단편적인 재미만을 쫓는데 그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쾌감 추구는 필연적으로 오래 가지 못해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세번째 문제는 두번째 문제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마스터는 그러한 이레귤러 팩터에 대해 플레이어가 의미를 부여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할 경우, '관대한 마음으로' 그를 인정해 주고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여러 플래그들의 관계와 조합 여부에 대해 꼼꼼한 내부 설정을 마친 참이고, 그를 섣불리 인정했다가는 예상치 못한 상호작용을 일으켜 시나리오 방향이 통제를 벗어날 수도 있다. 이 때, 마스터는 플레이어에게 말한다. '그에 대해 계속 적극적으로 RP하고 어필하고 부가 퀘스트도 클리어해서 나를 상대로 새로운 루트를 개척해 보3'.
<RPG는 마스터가 혼자서 알아서 짜둔 계획에 플레이어가 승차해 구경하는 게 아니며, 동등한 위치에서 향후 전개를 토의하고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맥락을 짜내어 가는 유희>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저런 식으로 마스터가 '관대한' 제안을 하는 상황 자체가 분명 잘못된 것이다.

4)마치며

RPG는 모든 참가자들이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단 한 명이라도 재미가 없었다면 그 날의 세션은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자아도취 형 마스터링은 철저하게 마스터 하나에게만 재미를 주는 데 특화되어 있으며, 마스터 이외의 모든 다른 참가자들을 철저하게 타자화, 대상화시킨다. 만일 마스터의 로망에 다른 모든 참가자들이 동의하며, 마스터가 배치해 둔 이벤트를 구경하고 반응하는 데 만족하고, 화끈하게 전투하고 돈과 경험치와 아이템을 챙기는 것만이 목표라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어쨌든 그 플레이의 참가자들 모두가 이해하고 만족한 것이라면 외부인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말해서도 안될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러한 기만적인 체제가 곱게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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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이었던가 플레이했던 WOD 워울프 게임의 기억을 떠올리며 슥슥.

사실 저러한 일종의 자아도취적 성향은 내게도 어느 정도 있다. 물론 나는 마스터링 경험보다는 플레이어링 경험이 더 많으며, 저것과는 다른 형태로 표출되긴 하지만... 마스터만 일방적으로 까는 건 공정하지 못하니 플레이어가 빠질 수 있는 자아도취적 성향에 대해서도 써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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