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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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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인프라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21세기 한국에서, 인터넷은 어떤 공간인가.

블로그나 공개 게시판에서 닉과 아바타의 기표로 나타나는 개인의 아이덴티티는, 물론 그 사람의 파편화된 일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누구나 사회생활을 하며 몇 겹의 페르소나를 통해 자신의 본질을 감추고, 그 페르소나들이 서로 합쳐지기도 하고 나뉘기도 하는 과정을 거치며 '무엇이 진짜 나인지'조차 불명확해 지는 것은 현실의 공간에서도 늘 일어나는 일이다.

인터넷은 단순한 도구적인 객체가 아니라 현실의 일부이며, 거기에 익명성이라는 현실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수한 팩터가 추가로 존재한다. 이 팩터는 현실의 그를 감추지만, 또한 동시에 그가 활동하는 인터넷 공간에서 그를 규정하는 새로운 기표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용자는 이 기표를 통해 역시 다른 기표와 접촉하고,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한다. 이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는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지만, 인터넷이라는 비중심적- 다원적 공간에서 행해진다는 게 다를 뿐 인간의 사회적 작용이라는 면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폭력과 증오마저도, 관계맺음이라는 본질에 있어선 사랑과 이해 같은 '긍정적인' 가치들과 동등함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익명성(Anonymity)- 상대가 자신을 알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자각은 사람을 솔직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솔직함은 자기 내부의 편견이나 악의를 여과없이 쏟아낼 수 있게도 하지만, 현실에서 늘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할 개인적인 고통이나 슬픔을 드러내는 것도 한결 쉬워지게끔 한다.

인간은 영원한 개인이며 고독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누구나 무의식적으로는 받아 들이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자신을 숨기려고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러한 고독을 표층 의식으로 끌어 올리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낯선 상대에게 불쑥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거나 상대가 그를 이용하려 할 수도 있다거나 하는 이유들도 있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이유다. 그러나 상대가 자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에 대한 훌륭한 방어막을 제공해 준다. 넷에서의 익명성이 주는 편안함, 보호받고 있다는 감각의 본질은 이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중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어차피 상대가 자신을 모른다는 것- 한 발 더 나아가, 언제든지 관계를 단절할 수 있다는 것을 통해 안정감을 얻는다면, 사람들이 자기 싸이나 블로그에 달린 악플 한 줄, 다른 커뮤니티에서 행해지는 자기 뒷다마에 그토록 분노하고 고소를 하느니 어쩌니 하는 게 설명되지 않는다. 자신이 사용하는 기표에 '자신'이 부분적으로라도 반영되어 있지 않은 한은 상대가 자신의 기표에 대고 어떤 모욕과 저주를 퍼붓건 알 바가 아니다. I'm not there, '난 그곳에 존재하지 않기에.'

이러한 사실들을 염두에 뒀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넷에서는 익명성이라는, 오직 인터넷에서만 존재하는 특수한 팩터가 중간에서 작용하며, 그가 물리적 기반의 부재, 중심 개념의 부재와 같은 다른 팩터들과 맞물린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넷 바깥의 현실에서와는 다른 형태의 소통이 이뤄지는 공간이라고 해도 그 양상과 층위만이 다를 뿐 인터넷 역시도 엄연히 현존하는 '실재'라는 것이다.

원래는 자주 가는 모 게시판에서 최근 일어난 사건을 보고서... 넷 상에서의 인간 관계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써보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다른 글이 돼 버렸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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