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이 필리버스터로 테러방지법 입법을 막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필리버스터는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지, 의사진행을 막을 권한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며칠 동안 국회 TV 방송을 보면서 즐거웠고 더민주당을 약간이나마 좋게 보기도 했던 것은, 이를 통해 더민주당이 '잘 지는 법'을 알아가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트위터를 비롯한 SNS 등지에선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의견이 보인다. 하지만 난 그것이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인식하고 있는 현실에 의거해서 보자면, 새누리당 놈들은 이미 지난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국민들의 의식 기저에 쌓여 온 욕망과 공포를 자극해 가며 스스로의 권력을 불가침의 철옹성으로 만들어 왔으며 이제 그것은 거의 완성된 상태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더민주당의 계산은, '어차피 숫자가 후달리는 이상 테러방지법이 통과되는 건 막을 수 없다. 그 대신 이번 필리버스터에서 최대한 선거 홍보를 해 놓고 다음 총선에서 승리해서 그걸 컨트롤해야 한다' 정도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얄팍하고 비현실적인 희망이다. 이미 그 정도 철옹성을 쌓아 둔 새누리당이 그렇게 둘 리 만무하다. 기울어진 운동장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활동해도 국민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번 필리버스터는 자신들이 세금만 축내는 밥버러지가 아니라는 걸, 자신들이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활동해왔다는 걸, 열흘이 넘는 기간 동안 모든 국민들 앞에서 알릴 절호의 기회였다. 더민주당은 그 기회를 날려 버렸다. 압도적인 강자의 위치에 있는 새누리당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이상, 더민주당은 끝까지 필리버스터를 완주해서 제1 야당으로서의 기개를 보였어야 했다.
싸우다 보면, '이 싸움은 이길 수 없다'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 지느냐가 중요해진다.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면, 최소한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국민들 앞에 확고히 천명해 보였어야 했다.
그래봤자 테러방지법 통과는 막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본 국민들이 투표장으로 가게 하는 힘은 있었을 테고, 그를 통해 새누리당이 쌓은 철옹성의 주춧돌에는 흠집이 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정치를 하다 보면 포기해야 하는 게 있고, 양보해야 하는 게 있다. 그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더민주당은 포기해선 안 되는 걸 포기함으로써 그간의 투쟁을 전부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오늘은, 3.1절이었다.
PS=그나마 정의당이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줬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