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담의 밤하늘은 언제나처럼 매연으로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낮에는 늘 당장이라도 비가 한 바탕 퍼부을 것처럼 어둑어둑하고, 밤에는 스모그 구름에 반사된 도시의 불빛들 때문에 요사스러운 기묘한 색으로 물드는 모습만이 고담의 하늘이 지을 줄 아는 두 표정이었다. 4년 전까지는 고담시경 옥상에서 발사된 대형 서치라이트- 통칭 배트 시그널의 빛에 새겨진 박쥐 무늬만이 때때로 그 혼탁한 하늘을 가로질러 수 놓이곤 했지만 그 빛에 이끌려 날아들던- 한 때는 고담 시민들의 과반수가 고담을 지키는 흑기사라고 믿었던 비질란테, 배트맨이 사실은 영웅 하비 덴트를 포함한 6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한 범죄자일 뿐이라는 게 밝혀진 지금 고담의 밤하늘은 혼탁하기만 했다. 그 고담의 한 뒷골목에서, 두 줄기의 마리화나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배트맨이 설치고 다니긴 했지만 예전이 더 좋았는데.”
“어차피 배트맨과 마주칠 가능성은 낮고, 짭새들한테 뇌물도 잘 통했고….”
“큰 조직들이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으니 뒷골목 관리도 더 잘 됐고.”
“팔코네부터 해서 마로니, 갬볼, 체첸, 자즈… 한 가닥 하던 조직 간부들이 줄줄이 죽거나 달려 들어갔더니, 오히려 별별 듣도 보도 못한 잡놈들이 우글댄다니까.”
“그래, 고담도 영 예전만 못해. 뭐, 그래도 미국 동부에선 아직 고담만큼 장사하기 좋은 곳도 별로 없으니까.”
“조커 기억하지? 그 미친 새끼가 한참 난리칠 때 말야, 내 사촌이 그 등쌀 견디다 못해 메트로폴리스로 옮겼는데 얼마 전에 다시 고담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칭얼대더라. 거기선 장사는 커녕 숨도 크게 못 쉰다던데? 아니, 자기 심장 소리마저도 죽이고 살아야 한다던가?”
이야기를 나누던 둘 중 뚱뚱한 흑인이 피우고 있던 마리화나를 발치에 쓰러져 있던, 회색 정장 차림의 중년 남자의 목덜미에 꾹 눌러 불을 껐다. 남자의 몸 아래서 흘러나온 피가 지저분한 바닥 위로 퍼져가고 있었다. 옆에 있던 덩치 큰 히스패닉 청년이 피식 웃었다.
“크핫, 메트로폴리스? 거긴 우리 같은 놈들한테는 무덤이야! 아니, 웬만해선 죽진 않으니 무덤이라기엔….”
그 때,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한 쌍의 검은 장갑을 낀 손이 히스패닉 청년의 목덜미를 잡아채고는 입을 틀어막은 채 그를 소리 없이 골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어?”
불을 끈 흑인이 방금까지 옆에 있던 동료가 사라진 걸 깨닫고 어리둥절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은 바람 한 점 없었고,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디에고, 어디 갔어? 야, 장난 치지마! 빨리 안 나오면 돈 나 혼자 챙긴….”
덜그럭. 골목 안에서 빈 깡통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흑인은 품에서 베레타 권총을 뽑아 들어 안전장치를 풀고 골목 안을 겨누었다. 그의 음성에 불안감이 묻어났다.
“씨발… 야, 디에고! 빨리 안 나와?”
그 때, 그가 서 있던 골목 위쪽에서 작은 금속조각 같은 게 날아들어서는 권총을 든 팔에 박혔다.
“아악!”
그는 고통보다는 놀라움에 순간적으로 권총을 떨어뜨렸다. 타앙! 충격으로 권총이 골목 안으로 발사되었고, 멀찌감치서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던 고양이가 기겁하며 달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거대한 박쥐의 날개가 비좁은 골목길 위로 펼쳐졌다. 그것을 올려다보는 흑인의 눈이 커졌다. 경악으로 크게 떠진 그의 흰자위가 어둠 속에서 희번뜩거렸다.
“배….”
뒷말을 채 잊지 못한 채 그는 억센 발길에 뒷통수를 얻어맞고는 정신을 잃었다.
그는 흑인의 팔에 박혀 있던, 자신이 손수 갈아 만드는 박쥐 형상의 표창- 배터랭을 회수했다. 늘 느끼는 것이었지만 일회용 무기를 일일이 만들어 쓰는 것도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주물 공장에 수주를 넣어 한 2~3000개 정도 대량 제작해 쌓아놓고 다니며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랬다간 꼬리가 밟힐 게 뻔했다. 다음은 응급처치였다. 팔의 동맥은 맞지 않게 던졌지만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지저분한 곳에 방치해뒀다가는 파상풍을 일으킬 것이다. 그는 허리의 유틸리티 벨트에서 붕대 스프레이를 꺼냈다. 커다란 지포라이터처럼 생긴 이 스프레이는 응용과학 부서에서 미군에 납품하기 위해 개발한 것으로, 노출된 피부에 몇 번 뿌리기만 하면 약제가 신속하게 흡수되어 지혈 및 진통 작용을 함과 동시에 산소와 반응해서는 열린 상처 위로 막을 형성해 웬만한 밀폐 붕대보다 확실하게 2차 감염을 예방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미군에서는 이미 표준 장비로 채용됐고, 수출도 되고 있으니 이거라면 정체를 들킬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다음으로 쓰러져 있는 중년 남자의 목덜미에 손을 얹은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맥박은 멈춰 있었고, 피부도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다. 이미 늦은 것이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여 죽은 남자에게 조의를 표했다. 이 남자는 어떠한 삶을 살아왔고,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자 했을까. 결혼은 했을까? 아이는 있을까? 그 아이는 아버지의 죽음을 접하고 어떤 슬픔과 절망을 느낄까? 그는 오래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감상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유틸리티 벨트에 돌돌 말려 있는 로프를 꺼내 기절한 흑인 남자와 역시 기절시켜 골목 구석에 박아둔 히스패닉 청년을 묶어서는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거리 근처로 옮겼다. 아무리 그라 해도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건장한 성인 남자 두 명을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일을 시작한 이후 계속 몸을 혹사시켜 온 결과도 몇 년 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전기를 흘려서 활공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는 망토와 그래플링 훅 건, 무엇보다 그 자신의 처절하기까지 한 신체 단련 덕택에 아직은 움직이는데 지장이 없었지만 걸핏하면 높은 데서 뛰어내리거나 하는 바람에 부담이 쌓인 양 무릎은 조금만 날씨가 험악하면 지독하리만큼 쑤셔왔고, 허리와 어깨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는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4년 전 그 날 이후, 최소한 내 흉내를 내는 자경단원은 더 이상 나타나질 않으니 그것 하나는 다행이로군. 그 기간 동안 한 번은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찌질이 하나가 겉모양만은 제법 그럴싸하게 만든 슈트를 걸치고 밤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고담 시경 소속의 존 블레이크라는 젊은 신참 경찰에게 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고 체포된 사건이 한 번, LSD를 투약한 친구 하나가 하비 덴트를 추모하는 특집 프로그램 촬영 현장에 난입하여 미녀 리포터 앞에서 바지와 속옷을 끌어내린 채 사실은 자신이 바로 ‘그’이며 자신은 누명을 쓴 것이고 하비 덴트 검사가 악당이라고 외친 사건이 한 번 있었지만 배트맨이 6명의 무고한 자들을 해친 살해범이라는 ‘사실’이 고담 타임즈 지면과 TV를 통해 두고두고 대서특필된 결과 자기 행세를 하던 이들은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대형 마트 장난감 코너에서 팔려나가던- 법을 무시하는 자경단원의 우상화 따위는 인정하지 못한다는 법원의 경고로 인해 노골적으로 닮지는 않았지만 잘 뜯어보면 자신을 모델로 만든 것이 명백한 슈퍼히어로의 인형 따위도 모조리 치워졌다. 대신 ‘마스크를 쓴 미치광이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사고방식을 분석하고 그의 정체를 추론한, 자칭 심리학자들의 책들이 서점에 한 동안 범람했고 그 중 한 권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영웅을 살해한 무자비한 살인마의 존재조차도 돈벌이 수단이 되는 고담이여, 내가 사랑하는 도시여 만세.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두 양아치들을 옮긴 그는 작은 권총처럼 생긴 그래플링 훅 건을 발사해서는 옆 건물의 옥상에 걸고 권총이라면 공이치기가 있을 부분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케블라 재질의 와이어가 소리 없이 감기며 그를 허공으로 끌어올렸다. 야트막한 옥상과 옥상을 건너뛰고, 홈통을 기어오르고, 누군가의 집 베란다에 매달리기를 몇 차례, 그는 벌써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스크 안이 땀에 젖어 축축했다. 자신도 언제까지고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슬슬 후계자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어 버렸다. 그 날의 진실을 아는 제임스 고든 경감, 아니 고든 청장마저도 최소한 대외적으로는 자신을 비난하고 추적하고 있으며 도시 전체가 적이나 다름없는 현재 상황에서 믿을 만한 후계자를 찾아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쉽지 않은 일인데다가… 자신이 매일 밤 수행해야 하는 의무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남에게 부여하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했다. 차라리 언제까지고 자신 홀로 묵묵히 이 힘겨운 의무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 더 나았다.
하지만.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가능할까. 시민들을 지키고 범죄와 싸운다는 것이, 나 혼자서 얼마나 더 가능할까. 자신은 나이가 들어 갈 테고, 몸 상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더 나빠질 텐데. 한 순간 알프레드도 폭스도 고든도 모두 죽은 뒤 홀로 남은, 지치고 병든 노인이 된 자신의 모습이 연상되며 끔찍한 절망과 무력감이 밀어닥쳤다. 시야가 새카맣게 흐려지고, 앵커슈터의 그립을 움켜 쥔 손이 미끄러졌다.
“……!”
실수다. 늘 긴장하고 감각을 곤두세워야만 할 정찰 도중에 잡념이 끼어든 대가다. 그는 이를 갈며 반사적으로 망토에 전류를 흘려보냈다. 파바바앗----! 형상 기억 섬유로 된 망토가 펼쳐지며, 글라이더가 되어 건물들 틈의 허공을 미끄러진다. 하지만 약간 늦었다. 지면에 정통으로 추락해 다리가 부러지는 것은 면했지만, 착지 타이밍을 제 때 잡아내지 못하는 바람에 그는 비스듬히 바닥에 충돌하며 10여 미터 이상을 미끄러져나갔다. 비명조차도 나오지 않는 고통이 전신을 휩쓸었다. 그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이 지역은 고담에서도 후미진 폐공장 지대라 보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일말의 안도가 뇌리를 스쳤다.
바닥에 길게 누운 채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선 몸 상태를 확인한다. 망토와 슈트의 방호 패드, 반사적으로 취한 낙법이 낙하의 충격을 상당히 줄여주긴 했지만 그래도 가슴팍이 지독하게 쑤셨고 시야 가장자리가 새카맣게 물들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전신 타박상. 약간의 뇌진탕이 있다.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가는 건 면했다. 둔하게나마 아직은 움직일 수 있다. 일어나야 한다. 혹시라도 보고서 쫓아오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고, 훅 건도 회수해야 한다. 그는 그렇게 판단하고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새벽이었지만 날이 밝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 본지 얼마나 되었더라? 그 날, 고담시경 옥상의 배트 시그널이 깨진 이후로는 하늘을 볼 일이 없었다. 범죄는 하늘 위에서는 벌어지지 않으니까.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며, 세상은 모두 평온하도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싯귀를 떠올리며 그는 잠시 그렇게 누워있었다.
시야 가장 자리, 폐공장의 거대한 탱크-한 때는 화학 약품 증류용으로 쓰였을- 위에서 작고 검은 형체가 나부끼는 게 보인다. 나뭇잎일까? 고담에서도 낙후된 이곳에 나뭇잎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온통 녹슨 파이프와 시멘트, 철근 골조 뿐인 이곳에. 그 검은 형체가 가볍게 탱크 위에서 보다 작은 다른 탱크 위로, 중간이 끊어진 커다란 파이프로, 엉성하게 매달려 있는 비좁은 비상계단으로, 지면에 선 채 녹슬어 있는 탱크로리의 지붕으로 연이어 건너뛰며 누워있는 그를 향해 다가온다.
“……!”
자기학대에 가까운 혹독한 단련을 통해 가다듬은 반사신경과 체력, 그리고 운이 그를 구했다. 그는 양 다리를 붙여 무릎을 끌어올린 뒤, 허리에 스프링처럼 탄력을 붙이며 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켜 서면서 옆에 굴러다니고 있던 쇠파이프를 집어 들어 첫 공격을 받아냈다. 챙강.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고, 그는 거의 시간차를 두지 않고 손을 뻗어 쇠파이프를 내려친 검을 휘두른 손목을 잡아채려 했다.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문득 날 길이 60센티미터 가량의 짧은 검이 묘하게 눈에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 형체는 간발의 차로 검을 놓아 버리고서는 바닥에 손도 짚지 않은 채 몇 바퀴 백 텀블링을 돌며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빠르다.
사르락. 격렬한 움직임에 길고 매끄러운 머리칼을 모아 묶은 끈이 풀려 떨어져 나간다. 그 검은 머리칼이 바위에 부딪쳐 비산하는 파도처럼, 섬세하게 세공된 작은 보석을 연상케 하는 차갑고 단정한 얼굴 주변으로 흩어진다.
“어지간히 단련한 인간도 한 순간에 목에 구멍이 났을 텐데. 듣던 대로 대단한 실력이군, 배트맨.”
그녀의 입가로 새하얗고 싸늘한 미소가 퍼져 나갔다. 허리 뒤에서 날이 크게 휘어 있는, 중국풍의 만도(彎刀)를 뽑아 드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배트맨은 쇠파이프를 일본 검도 식으로 쥐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리가 깊이 가라앉고, 다리는 어깨 너비보다 약간 좁게 벌려서 왼 다리를 뒤로 한 발짝 거리만큼 빼어 체중 대부분을 싣는다. 파이프 끝은 상대의 목젖을 향한다. 고담에서 한 가닥 하는 범죄자들의 면면은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낯설었다. 짙게 쌍꺼풀진 큰 눈과 오똑한 콧날은 인도계의 느낌을 연상시켰지만 인도계라기엔 피부색이 너무 밝았다. 앵글로 색슨계 백인과의 혼혈이 분명했다.
“…너는 누구지? 고담에선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녀는 대답 대신 쿡쿡 웃으면서 만도를 앞으로 내밀고는 과시하듯 휘둘러대며 천천히 배트맨을 중심으로 해 옆으로 돌기 시작했다. 배트맨도 더 이상의 대답은 기대하지 않고 신중하게 그녀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그 날랜 움직임은 평범한 범죄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숱한 훈련과 경험을 쌓은 노련한 암살자가 분명했다. 정체가 뭘까, 누군가가 날 죽이려고 고용한 걸까? 배트맨은 자신을 죽이려고 들 만한 이들의 리스트를 쭉 떠올려봤지만 머릿속에서 그 리스트가 끝나지 않을 듯한 느낌을 받고 포기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둘 사이의 공기를 가득 메웠다. 쿠르르릉. 둘의 머리 위 높은 하늘에서 나직하게 뇌성이 울고,
탓.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배트맨 쪽이 먼저 움직였다. 뒤로 빠져 있는 왼쪽 발에 일순 체중이 실리고, 슈트에 싸인 육체가 대지를 박차고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히며 그 손에 들린 쇠파이프가 적의 목을 향해 찔러져 들어가다가 한 순간 방향을 꺾어 만도를 든 팔을 노렸다.
“흥!”
그에 대해 그녀는 연필 깎듯 만도를 마주 베어 와서는 파이프를 비스듬히 쳐냄과 동시에 손목을 뒤틀며 배트맨의 손에서 파이프를 떨어뜨리려고 해왔다. “!” 목을 노린 게 페인트란 걸 눈치챈 건가. 배트맨은 파이프를 쥔 양 손에 힘을 주며 그대로 밀어 붙이려고 했으나 사각에서 날카로운 로우킥이 날아들어 그의 허벅지에 꽂혔다.
“큭…!”
“당신이 치명적인 공격은 안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좀 더 그럴싸하게 노리라고.”
비웃음과 함께 비틀대는 배트맨의 마스크 위로 만도를 쥐지 않은 왼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허공에서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벌려지고, 그것이 배트맨의 눈을 노린다. 피할 틈은 없다. 배트맨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이마로 그 손가락을 들이받았다. 빠각. 마스크가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손을 털며 다시 물러났다. 그 짧은 순간에 다시 주먹을 쥐고 장저로 박치기를 받아내 손가락이 부러지는 걸 모면한 것이다.
“좋은 순간 판단력이야, 그 정도는 되야 고담까지 온 보람이 있지!”
그녀는 배트맨이 쥔 쇠파이프의 간격 바로 바깥에서 가볍게 풋워크를 밟으면서 도발해왔다. 여전히 오른 손에 들린 만도가 번뜩이고 있었다. 배트맨은 상대가 어떻게 나와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중단 자세를 유지한 채 그 움직임을 신중하게 관찰했다. 복싱을 연상케 하는, 통통 튀는 가벼운 발놀림이 멎고 천천히 그녀의 자세가 바뀌었다. 무게 중심을 허리 아래에 두는 낮고도 좁은 자세와 신속한 진퇴 및 방향전환이 가능하도록 자연스럽게 앞뒤로 벌려 선 양 다리, 양 팔을 ㄴ자로 꺾어서는 팔꿈치를 몸에 바짝 붙이고 앞으로 가볍게 펼친 손. 그 중 앞 쪽을 향한 오른 손에 만도가 들려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배트맨도 익히 아는 자세였다. 당랑권(螳螂拳)이로군, 17세기 경 소림사의 한 무술가가 나비를 사냥하는 사마귀의 모습을 본 따 만들었다고 하는 무술. 외모는 중국 권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당랑권의 파해법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저 만도가 신경 쓰였다. 배트맨은 가볍게 호흡을 내뱉으며 짧게 찔러 들어갔다. 당랑권은 본질적으로 기다리면서 상대의 움직임을 읽은 뒤 선공을 회피하고 붙잡아 던지기나 빠른 연타로 반격하는 무술. 그만큼 고도의 정신집중을 요하는 고급 무술이었고, 그러한 집중을 깨뜨리기 위해선 의외의 움직임으로 허를 찔러야했다. 배트맨이 내지른 쇠파이프는 순식간에 그녀의 가는 몸을 향해 쇄도해 들어가는 듯하다가 빠르게 다시 거둬졌고, 그녀는 그걸 미리 읽은 듯 미동도 않고 그 자리에서 대기했다.
“뭐야, 겨우 그런 얕은 수에 내가 말려들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분노가 떠올랐다. 역시 이렇게 노골적인 페인트는 안 통하는군.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다. 하지만…. 그 덕에 알아낸 게 하나 있었다.
“짜증나네, 당신. 소문의 배트맨이 이렇게 쪼잔한 남자일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뭐, 좋아. 그럼 이 쪽에서 먼저 가지.”
타탁, 가벼운 발놀림과 함께 만도가 짓쳐들어와 쇠파이프를 걷어냄과 동시에 그 칼날이 쇠파이프를 타고 불꽃을 튀기며 미끄러져 내려와 배트맨의 오른 손목을 노린다. 역시. 평범한 인간은, 아니 제법 단련된 인간이라고 해도 당장 눈앞에 무기가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그걸 상대의 ‘공격수단’으로 판단한다. 그렇기에 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무술에서는 상대의 특정한 무기 하나나 타격 부위 하나에 현혹되지 말고 항상 시야에 적의 움직임 전체를 넣으라고 가르치는 것이며, 반복 훈련을 통해 생각하기도 전에 그를 읽어내고 몸이 반응하게끔 하는데 역점을 둔다. 그러나 아무리 훈련해도 사람에게 있어 가장 의존도가 큰 외부 감각기인 눈에 우선 들어오는 무기나 주먹, 팔꿈치 따위에 한 순간 본능적으로 정신이 분산되는 건 어쩔 수 없고, 그 ‘한 순간’을 극한까지 줄여 말 그대로 찰나 미만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고수의 조건이다. 이 여자는 그걸 이용해 만도로 상대를 현혹시킨 뒤 공격을 받아 내거나 흘리고 반대쪽의 주먹이나 발차기로 반격을 가하는 게 특기다. 그렇다면….
배트맨은 순간 양 손에 힘을 줘, 크게 손목을 뒤틀며 쇠파이프를 뒤집었다. “!?” 그녀의 표정에 미미한 경악이 스친다. 만도의 날이 미끄러져 허공을 베고, 그 궤적 뒤에 그림자처럼 숨어 배트맨의 마스크 아래 노출된 턱을 노리고 날아들던 주먹을 배트맨은 왼쪽 어깨 위로 흘려보낸다. ‘문’이 열렸다. 망토가 크게 나부끼고, 배트맨은 크게 진각을 밟으며 노출된 그녀의 명치- 인체의 중심선을 한 줄로 잇는 급소 가운데를 향해 오른쪽 팔꿈치를 깊이 꽂아 넣는다. 대팔극- 정심주(大八極- 頂心肘). 완벽한 호흡과 타이밍으로, 팔극권의 여러 타법 중에서도 단타로서는 가장 강맹하다 꼽히는 기술이 정통으로 들어갔다. 배트맨의 팔꿈치가 그녀의 흉골을 박살내기 직전,
한 기억이 그를 잡아챘다. 조커, 고담의 백기사를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렸고 자신도 그렇게 만들려고 했으며 한발 더 나아가 고담 시민들도 추악한 괴물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려고 했던 혼돈의 사도. 그의 일그러진, 광기로 가득 찬 미소가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난, 살인은 하지 않아.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그 결의가 배트맨의 손속을 늦췄다. 그리고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야아-!”
그녀는 배트맨의 정심주에 직격당하기 직전 몸을 뒤로 빼며 크게 도약했고, 그 덕에 혼신의 일격은 충분히 깊은 타격이 되지 못했다. 그걸 보며 배트맨은 혀를 찼다. 백학권(白鶴拳)의 도약 기술이었다. 단숨에 거리를 벌린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착지해 가슴을 손으로 눌렀다. 얕게 맞았지만 꽤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배트맨은 숨을 몰아쉬며 자세를 수습했다. 아드레날린에 잠시 억눌렸던 통증이 다시 밀려오고 있었다. 땀방울이 속눈썹에 맺히고, 사이키델릭 조명이라도 켠 듯 눈꺼풀 안쪽이 껌뻑거렸다. 끝을 낼 기회였는데, 뭐 어쩔 수 없지.
그녀가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시종일관 차가운 미소가 깃들어 있던 입매는 딱딱하게 굳어있고, 눈은 스산하게 빛났다.
“팔극권이로군, 도시 환경 내에서 총을 든 범죄자들과 싸운다는 당신의 특성으로 봐서 이런 무술은 거의 잊어버렸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너무 얕본 것 같네. 사과하겠어, 배트맨.”
배트맨은 대답대신 조용히 숨을 고르면서 빠르게 생각했다. 복싱 특유의 가벼운 풋워크, 당랑권과 조합한 만도술, 게다가 백학권이라. 일개 암살자가 모두 익히기에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무술들이었다. 암살자는 격투기 선수가 아니다. 게다가 배트맨이 보기에 이 여자는 그 중 어느 한 가지 무술도 겉핥기로 익히지 않은, 달인이라고 불러 아깝지 않은 고수였다. 그가 알기로, 이토록 기원과 철학이 다른 상이한 무술 체계들을 골고루 익히고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전환해가며 싸우기 위해서는 지구 전체를 통틀어서도 단 하나만 존재하는 조직에서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녀가 사용하던 어딘가 눈에 익은 검.
“넌, 그림자 동맹(The league of shadow)의 생존자인가?”
억제하려고 했지만, 배트맨은 자신의 목소리가 미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목표에게 자기 정체를 들켜서야 암살자로서 실격이지만, 그 목표가 옛 동문이라면 눈치채여도 어쩔 수 없겠군. 정식으로 소개할게, 내 이름은 탈리아 알 굴.”
그녀는 정중하게, 그림자 연맹 특유의 동양적인 방식으로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건네 왔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듀커드- 라스 알 굴의 딸이야.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당신을 죽이고 고담을 정화하러 왔어, 브루스 웨인.”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프롤로그 끝나고 본편 시작인데... 전투는 여기까지 쓰고 막힘. 이야기전개상여기선배트맨이이겨야하는데이를어쩐다으어어다른부분먼저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