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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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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로저 워터스

군대를 제대하자 마자 찾아서 참가한 팀에서 OWOD 와일드 웨스트 워울프를 하며 만들었던 캐릭터. 첫 WOD 플레이였는데... 대강의 설정 같은 건 전부터 알고 있었고, OWOD 룰 자체가 워낙 불합리해서 그렇지 어려운 룰은 아니라 빨리 적응했었다. 플레이 전에는 막연히 쿨가이 사일런트 스트라이더나 간지 쩌는 실버팽을 할 생각이었는데... 정작 머릿 속에 촤르르륵 떠오른 건, 잉글랜드 귀족 가문 출신의 사춘기 청소년. 근본적으로는 착한 녀석이지만 반항심이 강하고 머리에 피가 자주 몰리는 성격인데다 자제력이나 통찰력이 부족해서 종종 돌출행동을 한다는 컨셉이 잡혔다.

 

해당 팀에서는 '1부 끝' 분위기로 캠페인이 종료된 뒤, 다른 팀에 들어가 워울프를 플레이할 때 다시 불러왔었다. 아직 미성숙한 사춘기 소년이던 이전 팀에서와는 달리, 나이도 들었고 랭크도 엘더로 오르며 정신적으로도 꽤 성장해서... 이 다른 팀에서의 로저 워터스는 그야말로, '나 자신을 기반으로 했지만 현실의 나보다 훨씬 유능하고 단호한' '나 자신의 근본적인 성격이나 가치관을 유지하는 한도 내에서 극한까지 그를 업그레이드한' 워너비 캐릭터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피할 수 없는 종말을 앞에 두고도 물러서지 않는 강직함과 비장함이라는 OWOD 워울프 특유의 로망+용맹하고 의협심 강하고 행동파에 머리도 좋은 편이지만 감정이 풍부하고 피안나답지 않게 연애에는 일편단심. 원래 '로망'이라는 건... 자신과 동떨어진, 옆에서 지켜보는 걸로 만족스러운 종류의 로망이 있고, 자신이 되고 싶은 종류의 로망이 있는데 로저라는 캐릭터는 후자에 속했다. 그만큼 애정도 컸고, 플레이 내 환경 때문에 계속 큰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대단히 일인칭적으로 강하게 몰입했었다.

 

그리고 캠페인은 워울프를 비롯한 모든 변신 종족들이 따르는 위대한 어머니 가이아가 사실 흑막이었다! 는 전개로 흘러가고... 충격과 공포가 밀어닥치는 와중에도 단지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갈 이 세계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싸우던 중, 어보미네이션이 되 버려서는 절망에 짓눌려 자결하는 걸로 끝났다(다른 PC들도 계속 더 진행을 하려면 할 수 있었겠지만 같이 자결하는 쪽을 택했고, 나는 새벽 3시에 넋 나간 부랑자 꼴을 하고 바깥에 나가 술을 마셨다). 당시 텔러가 준비해 둔 임의의 다른 변수들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결국 세계가 아포칼립스를 맞이해 파국으로 치닫는 배드 엔딩은 면했지만... 로저 워터스라는 캐릭터의 행보는 거기서 끝났다(몇 년 뒤 간신히 트라우마를 어느 정도 떨치고 또 다른 팀에서 플레이한 워울프 캠페인에서는 평행세계 비스므리하게 내 PC였던 '영월'의 친구 포지션으로 멀쩡히 등장했지만 그 때는 NPC였으니).

 

'본능적 과정'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였는데도, 플레이하는 과정도 결과도 즐겁지 않았던 거의 유일한 예외 케이스다. 플레이 도중에는 워낙 이입하는 바람에 여유 있게 즐길 만한 마음 상태가 아니기도 했고, 로저가 실질적인 '주인공' 포지션이었다 보니 의무감이 앞서기도 했고-_- 당시 플레이가 끝난 뒤 나는 한 달이 가깝게 멘붕 상태였고(...쓰다 보니 다시 그 때의 트라우마가 슬금슬금 떠오른다...으윽), 이 때의 경험을 계기로 세션에서 이야기되는 '합의에 의한 플레이' 방식의 가능성에 개안하게 되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

 

2)영월

1)의 사건 이후로... 한참을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 '나 다시는 WOD 워울프 안해ㅠㅠㅠㅠㅠ 해도 피안나 부족의 호미드 출신 아룬은 안해ㅠㅠㅠㅠㅠㅠ' 하다가, 지인의 설득으로 인해 오랜만에 다시 워울프 캐릭터를 잡으면서 만들었던 섀도우로드 루퍼스 라가바시 캐릭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1)의 사건 당시의 좌절감을 보상이라도 하듯, 플레이 과정도 내내 스무스했고 마무리도 과거 극복에 잘 생긴 남자 친구에 포스 쩌는 양 아버지까지 줄줄이 챙기며 WOD로서는 보기 드문 해피 엔딩이었다(...그래봤자 WOD니 결국엔 아포칼립스가 와서 다 망하겠지만).

 

캐릭터로서의 특성은.... 내가 플레이한 숱한 캐릭터들을 통틀어 한 손에 꼽을 만한, '모에한 여캐'(...) 대놓고 노린 건 아니었는데 플레이를 하며 순간적으로 '이런 대사 치면 멋있겠다' '이런 선언을 하면 앞에서 나온 떡밥과 연관지을 수 있지 않을까' 가 떠오르는 대로 실행에 옮겼다가... 몇 세션을 거치면서 돌아보니 모에 캐릭터가 됐다. ORPG다 보니 좀 오글대는 대사나 묘사에 대한 부담이 덜하기도 했고. 주요한 면모는 루퍼스라서 인간의 사고방식을 낯설어 하고 무뚝뚝하다는 데서 오는 쿨함과, 잃어 버린 과거의 기억을 되찾고 싶다는 욕구에서 비롯한 왕성한 호기심, 통찰력은 뛰어나지만 자기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데에는 서툴다는 데서 비롯하는 명약관화 등. 팩의 다른 실버팽 아룬 캐릭터와 얽히면서 연애 플래그를 세우고, 천연과 츤데레의 양쪽 속성을 모두 갖고 있는 레전드 캐릭터가 되었다. 다른 PC들과의 상호작용도 풍부해서 시리어스도 개그 씬도 다양하게 뽑아냈다. 지금도 가끔 그 때 플레이했던 거 로그를 꺼내 읽곤 한다.

 

플레이 외적으로는, 제한된 방식의 '합의에 의한 플레이'를 수행하면서 그 한계를 느끼는 계기가 되었었다. 상세한 것은 http://www.rpg-session.net/bbs/76631 이 글에 정리되어 있음.

 

3)강 해원

무려 700CP 짜리 무한 경비대 특무부 캠페인에서 플레이한 캐릭터. 캠페인 분위기도 역사 조작과 세계 이동이 어쩌고 이세계 문명에 미치는 여파가 저쩌고 하는 것보다... 특무부라는 편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한 초인물에 가까웠다. 보통 이런 캠페인에선 온갖 고유공격을 비롯한 초상능력으로 떡칠한 캐릭터가 나오게 되지만(....) 그 때의 나는 이미 '100CP 짜리 고유공격을 만들기보다는 무한경비대 병참과 창고에서 RPG-7이나 포펜타인을 집어 와 그걸 뿜뿜 쏴대는 게 룰적인 효과는 비슷한데 훨씬 싸게 먹힌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든 게, '극한의 훈련 과정과 무수한 실전 경험을 쌓은-그러나 초능력이나 마법 같은 건 전혀 못 쓰는- 극도로 유능한 일반인'이었다. 무한세계 룰북의 인터월드 독립요원 템플릿을 기본으로 해서, 나노 처치를 받았다는 핑계로(사실은 초상 능력 비슷한 게 전혀 없으면 슈퍼 초능력자와 육화한 살인 정령 사이에서 묻힐 거 같아서였지만... 기우였다는 게 밝혀짐. 다른 PC들이 좀 '뒤로 빼는' 성격이었던 데다 설정 상 오랫동안 복무한 베테랑이고 스콜체니 부장과도 친구다 보니 윗선과 교섭하거나 내부 정보를 얻어 듣는다거나하는 중요한 장면이 자주 배정되서 오히려 존재감 폭발했다) 고속 사고나 저항력 강함 등 특이 능력 좀 주고, 고TL 이세계에서 빼돌렸다는 설정으로 아이언맨 슈트랑 좀 비슷한 전투 장갑복이랑 광선검과 가우스 라이플을 비롯한 고TL 무기 몇 개 들려주고... 설정은 전쟁물 등에서 자주 나오는, '유능하고 조직에 대한 충성심도 있지만 매번 작전에 나갈 때마다 동료들이 전멸하는 징크스가 있어 따돌림 당하는 에이스' 컨셉을 가져왔다.

 

경비대와 무한 그룹의 상층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잘 아는 노련한 베테랑이고 어느 정도 선까지는 지저분한 일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린 애들을 전쟁에 끌어 들이는 건 지나치지 않냐고 오토 스콜체니 부장을 설득하는 장면이나 동료에게 오해를 사 심한 말을 듣고서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다가 나중에는 혼자 주저 앉아 펑펑 우는 장면 등 괜찮은 장면도 많이 뽑혔고.... 마스터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도 외로움을 타지만 겉으로는 "난 게으른 아저씨일 뿐이야 크헤헤" 같은 소리하며 억지로 밝은 척하는, 의외로 인간미 있는 30대 중후반 아저씨 캐릭터라는 컨셉이 확실히 먹혀 꽤나 만족스러웠던 편. 캐릭터 입장에서 봐도 1n년 연하의 여자 친구까지 사귀고 인생의 승리자로 엔딩을 맞이했다(2기 캠페인 떡밥도 많았는데 마스터가 수험 준비에 들어가며 그 후로 연락이 끊겼다). 전통적 플레이에 가까운 방식이었지만, '마스터의 의도'도 적절한 타이밍에 빠르게 읽히고.... 적극적으로 장면을 제안해서 드라마틱한 상황을 만드는 데 있어서도 머리가 잘 돌아갔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충 강해원이라는 캐릭터로 플레이를 할 무렵 '본능적 캐릭터'에 대한 개념이 대충 내 머릿 속에서 잡힌 듯하다. 당시 플레이 로그가 한 두 개 정도를 빼고는 전부 소실되어 무척 아쉽다.

 

4)하비에르 리베라

현재 토요일 던전 판타지 팀에서 플레이하고 있는 도둑+기사 캐릭터. 모델은 아즈텍 제국 멸망을 이끈 스페인의 탐험가 에르난 코르테스. 세션 쪽에 올라온 구인 글에 맛보기로 나와 있던 배경 세계 설정을 보자마자 머릿 속 한 구석에서 튀어 나왔다(....) 기본적인 성격은 1)딱히 이렇다 할 어두운 과거사도 뭣도 없는 타고난 악인,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나 일반적인 도덕 관념을 의식해서 세련된 예의와 화술로 스스로를 포장한다 2)거창한 야망이나 목적의식 없이 다만 부와 권력을 추구할 재능이 있으니 그러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는 것 자체로 만족하는 편 3)새로운 것과 미지의 것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과 모험심+유능한 인재를 아끼고 가능한 곁에 두고 싶아한다 정도.

 

지금도 계속 플레이 중인 캐릭터라 뭐라고 하기가 힘들지만.... 지금까지 11세션을 플레이해오며 느끼고 있는 바로는, '본능적 캐릭터'의 한 정점에 이른 듯. 플레이에 몰입하면 머리가 맑아지면서 자기 캐릭터만이 아니라 다른 PC들과, 사건에 얽혀 있는 NPC들과, 그들 간의 갈등 상황 등 전후 사정들이 마치 중간 중간의 페이지들이 찢겨져 나간 책을 읽듯이 '읽힌다'. 그리고 사건이 진행되고 추리를 할 만한 단서가 모이면서 그 페이지들이 주르륵 채워진다.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거나 아직 단서가 부족하면 버퍼링이 좀 길어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매우 명료하게 전후 관계를 파악하고 객관적 입장에서 스토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좀 많이 과장하자면 마치 제로의 영역 같은 느낌. 이 만큼 움직이기가 만족스러운 캐릭터는 정말 오랜만이다. 실로 완전체.

 

하비에르라는 캐릭터로 플레이하면서 느끼는 또 다른 특이점은, 애초에 떠오른 '계시'에서는 더 이상 변화의 여지가 없는 완성형 소시오패스였고, 나도 굳이 변화시켜야 할 필요나 플레이 내에서 변화할 만한 여지를 못 느꼈는데... 플레이가 지속되며 그런 필요성이 어느 정도 생기자, 타이밍 적절하게 다른 PC가 자리를 깔아줬고 내 손은 저절로 움직였다(...) 결과는 장기말 취급에서 벗어나 동료애에 슬슬 각성하기 시작하고, '목적의식'이 생기기 시작. 그런데 또 그게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자 위화감이나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별로 안 든다.

 

마스터도 숙련자고 다른 플레이어들 중 두 분도 꽤 노련하고 센스가 있는 분들이라 플레이 환경도 꽤나 쾌적한 편이다. 하비에르 리베라라는 캐릭터로 플레이하면서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거의 모든 상황에 있어 만족도가 높은데, 지나치게 운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는 터라 앞으로도(또는 다른 플레이에서도) 계속 이러한 흐름을 유지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 밖에 없다. 4개 시점 중 작가적 시점에 대한 지원이 좀 부실하지만 나머지 3개 시점은 80% 이상 만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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