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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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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이후로 <차우>와 더불어 최고 기대작이었던-정유미가 나오니까!- <왓치멘>을 보고 왔다.

배트맨은 부모의 죽음에 트라우마를 가진 사내가 타락한 도시의 어둠 속에서 외로운 정의를 추구하는 이야기였다. 엑스맨은 자신들이 가진 특별한 힘 때문에 차별 당하는 초인들의 이야기였다. 헐크는 압도적인 힘과 체력, 그리고 거대한 분노를 가진 내면의 또 다른 자신과 투쟁하는 이야기였다. 스파이더맨은 힘과 책임, 그리고 사회와의 조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왓치멘의 영웅들은, 물론 일반인들보다 훨씬 강하긴 하지만 그 중 한 명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그 한 명은, 거의 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렇다 할 초능력 같은 건 전혀 없는 일반인들이다. 그들은 하늘을 날지도 못하고, 바위를 집어 던지는 괴력도 없고, 불로불사하지도 못한다. 그들도 굶주리고, 피로해지고, 총에 맞으면 죽고, 개인적인 감정과 욕망에 번민한다. 그들은, 그들 주변을 둘러싼 사회의 거대한 흐름에 거역하지 못한다.

내가 왓치멘의 원작 만화를 읽으며 가장 높이 평가한 부분은 이러한 '현실적인 초인들'의 딜레마가 아주 잘 표현되었다는 점이었다. 코미디언은 미국이라는 '제국'의 가장 어둡고 추한 면을 가장 극단적으로 반영하는 인물이었다. 로어셰크는 자신만의 정의에 대한 편집증적인 집착을 갖고 있었다. 나이트 아울은 실크 스펙터에 대한 애정, 실크 스펙터는 어머니와의 갈등이라는 식으로 다른 인물들도 나름의 사정과 고뇌를 가진 채 그에 얽매여 있었다. 주인공들 중 유일한 초능력자이며, 작중에서 "슈퍼맨은 존재하며, 그는 미국인이다"라고까지 표현되는 반신적인 인물인 닥터 맨해튼마저도 바로 자신의 거대한 힘 자체에 구속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이 가면을 쓴 영웅들의 활약에 힘입어 미국의 승리로 끝난 뒤 정부는 영웅들의 자경 활동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그들의 대중적 인기와 영향력을 두려워한 결과일 것이다-, 종전 이후 반전 평화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대중들은 영웅들을 정체 모를 위험한 어릿광대 취급하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나이를 먹은 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원작 만화에서, 나이트 아울이 젊은 시절 입던 슈트 옆에 앉아 고뇌하는 장면은 원작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였다. 내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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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장면.

그러나 중반을 넘어서며 영화는 원작과는 약간 다른 전개를 취하며 설득력을 잃는다. (이하 네타)

오지맨디아스는, 핵의 위험과 자원고갈의 불안에 떠는 법 없이 평화롭게 번영을 구가할 수 있는 세계라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도시 하나를 날려 버렸다. 원작에서 이 장면은 1대 나이트아울이던 홀리스의 저작 발췌나 과거 회상을 통해서 오지맨디아스라는 인물의 여러 면모가 구체화되며, '영웅주의에 빠진 과대망상 파시스트'라고 단순하게 까기가 상당히 힘들어지게 하는 과정이 독자에게 충분히 제시된 이후에 나온다. 게다가 원작 내에 액자 형식으로 삽입되어 있는 만화인 검은 배 이야기나, 거의 마지막 부분 오지맨디아스가 닥터 맨해튼에게 자신이 과연 옳은 일을 한 거냐고 물으며 절규하는 장면은 이 인물에 대해 연민을 가지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오지맨디아스는 독선적이고 재수없는 영웅주의자일 뿐이다.

잭 스나이더 감독은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욕심이 지나쳤다. 러닝 타임이 길어봤자 180분을 넘기기 힘든 상업 영화에서는 원작의 밀도를 재현하며 주제의식을 잘 살려 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나이트아울과 실버 스펙터의 비중을 줄이고 로어셰크와 닥터 맨해튼, 그리고 오지맨디아스의 인물을 부각시키는 데 집중하는 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을 듯 하다. 아니면 차라리 '한물 간 영웅들이 다시 뭉쳐 과대망상에 빠진 캐악당을 때려잡고 하하호호하며 끝내는 액션 영화'로 만들던가. 원작을 읽었을 때는 영화 그렇게 만들면 제작사를 폭파시키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뭐랄까-_-

그러나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불만스러웠던 장면은, 군중들의 시위 장면에서 등장한 문구 '누가 감시자들을 감시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관객이 생각해 볼 만한 여지를 주지 않은 채 그냥 휙 넘어가 버렸다는 점이다. 원작에서 저 문구는, 최종보스(?)의 결정과 나란히 독자들에게 많은 생각꺼리들을 던져 준다. 하지만 영화에서 저 문구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장면 중 하나로 끝나 버렸다. 그럴 꺼면 차라리 빼라고!
 
ps=그래도 영화만의 장점도 있긴 하다. 케네디 암살의 진범에 관한 추가 설정이라거나, 오지맨디아스가 협력 중인 에너지 기업체 중역들을 협박하는 장면은 꽤나 그럴 듯한 해석이었다. 그리고 특히 화성에서의 장면 오오... 내가 왓치멘을 한번 더 보러 간다면, 그 이유 중 절반은 화성에서의 그 장면을 다시 보고 싶어서 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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