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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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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본 지 며칠 지났지만, 머릿속에서 생각을 좀 정리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볼 만한 영화가 유달리 많이 나온 올 여름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다크 나이트>는 날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최고의 기대작이었다. 그리고 역시 날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 만족을 표시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대해 저마다 한 마디씩을 했지만, 난 이 글에서 '조커'란 캐릭터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1)
히스 레저의 조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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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작과 동시에 보이는 그의 뒷모습이다. 한 손에 광대 가면을 들고 고개를 떨군 채, 그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내가 파악하는 조커는 단지 도시가 불타고, 밝고 선량한 면모도 분명 갖고 있던 사람들이 불신과 공포에 차서 서로를 죽이려 드는 아수라장을 지켜보는 쾌감만을 위해 거리낌 없이 악을 저지르는 순수한 악의 광대다. 자신의 유희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 돈도, 권력도, 명성도, 사랑도, 심지어 스스로의 목숨도.

이러한 면에서 봤을 때, 완전한 혼돈의 사도이며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저 지평에 있는 존재라는 <다크 나이트>의 조커 설정은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조커가 과거도 없고, 어떠한 데이터 베이스에도 기록이 없는 존재라고 나오는 장면에서 무릎을 쳤다).

그러나 이러한 매력적인 설정과는 달리, 히스 레저가 연기하는 조커에게서는 그러한 초월적인 아우라가 없다. 물론 히스 레저가 훌륭한 연기자라는 건 인정하며, 그가 이 영화를 위해 대단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도 안다(오죽하면 자살했을까). 그러나 나는 스크린에서 히스가 연기하는 조커를 본 것이지, 조커 그 자신을 본 건 아니었다.

그의 눈빛, 음성, 동작 하나하나에서는 히스가 이 배역을 위해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했는 지가 절절히 드러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아무도 알지 못할 뿐, 나름 인간으로서의 과거와 사연을 지닌 악당' '인간에 대한 뿌리깊은 악의와 증오를 가진, 그를 광기와 무작위성으로 포장하는 악당'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정리하자면, '악당이 광대짓을 한다'랄까.
 
히스 레저의 조커는, 결코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그를 순수한 광대로 보기엔, 그의 웃음 소리 너머에서 너무도 인간적인 슬픔과 고뇌가 느껴졌다. 그렇기에, 난 저 장면에서 고개를 떨군 그가 슬퍼하고 있었으리라고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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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잭 니콜슨의 조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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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버튼의 89년 버젼 배트맨에서 조커는, 원래 마피아 두목이었으며 브루스 웨인의 양친을 살해한 원수로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배트맨이 된 브루스와의 대결 중 화학 약품이 든 통에 빠지는 바람에 얼굴에 상처를 입어서 웃는 표정 밖에 짓지 못하게 되었다는 게 잭 니콜슨 조커의 설정이었다(정확하진 않다, 옛날 버젼 배트맨을 본 게 워낙 오래전인데다가 애니 버젼의 설정과 뒤섞어 기억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니 상세히 아는 분은 알려 주시길).

1)에서도 언급했듯이, 잭 니콜슨 조커에 대한 이러한 설정은 내가 '조커'라는 캐릭터 자체에 대해 갖고 있는 기대와는 어긋난다. 내가 생각하는 조커란 오직 유희만을 위해 뭐든지 저지르는 궁극의 카오스이며, 이러한 인간으로서의 근원 같은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난 89년 버젼 배트맨에서 잭 니콜슨이 연기하는 조커가 아니라 조커 자신을 보았다. "달빛 아래서 악마와 춤춰 본 적 있나?"라고 질문을 던지는 그는 카리스마적이고, 교활하고, 무자비했으며, 천진했다. 조커라는 존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배경 설정과는 달리, 즉물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잭 니콜슨의 조커는 '초자연적인 광기와 혼돈의 살아있는 화신'으로서, 절대적인 아우라를 품고 군림했다. 그리고 그가 행하는 모든 죄악과 그 결과물을 그는 거리낌없이 즐겼다. 정리하자면, '광대가 악당짓을 한다'랄까.

잭 니콜슨의 조커는, 아무런 모순도 번민도 없이 모든 것을 유희의 일환으로 취급했다. 그의 웃음 소리 너머에서 난, 인간이 사는 세계 저편에서 어떠한 종류의 이해도 인정도 필요로 하지 않은 채 스스로 온전히 존재하는 초월성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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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두 명의 조커, 89년 버젼의 배트맨과 <다크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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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과 플롯에 있어서는, <다크 나이트>가 더 좋았다. 그러나 '조커'라는 캐릭터가 응당 가져야 할 힘과 광기에 있어서는 89년 버젼의 배트맨이 더 좋았다.

이러한 엇갈림은, 팀 버튼의 고담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고담이 다르다는 것에서도 기인하는 듯 하다. 버튼의 고담은 음울하고 우중충한, 어둡긴 하되 현실 세계와는 다른 양상의 어둠을 가진 몽환의 도시였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 내에서 조커의 악마적인 초월성은 빛을 발했다. 그러나 놀란의 고담은 부패한 경찰 및 관리가 대다수고 갱들이 어슬렁대는 슬럼가가 도처에 깔려 있긴 하되, 아침이 되면 해가 뜨고 극소수의 선인도 절대다수의 악인도 그 빛을 쬘 수 있는 '현실에 충분히 있음직한' 도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잭 니콜슨이 연기했던 89년 버젼 배트맨의 조커는 어두운 과거로 인한 고통도, 우울한 미래에 대한 절망도 없이 혼돈과 파괴 자체를 위해 종사하고 그를 즐기는 유형이고... 히스 레저가 연기한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인간의 내면에 깔린 어둠과 악의에 대한 확고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공포와 광기를 뿌리는 유형이었어야 했던 걸로 보인다. 이로써 전자의 조커는 이렇다할 존재 근원이나 탄생 배경 없이 스스로 완전한 '광대'가 될 수 있으며, 후자의 조커 역시 유쾌해 보이는 태도 뒤에 인간성에 대한 철저한 증오와 악의를 숨긴 '악마'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시간이 지났고, 팀 버튼의 배트맨도 크리스토퍼 놀란의 새로운 배트맨도 세상에 나왔다. 전자는 이미 고유한 영역을 쌓아 올렸고, 후자도 호평 속에서 그를 구축해 가고 있다. 둘 다 지금 이대로도 물론 훌륭한 작품이지만, 유독 조커라는 캐릭터에 대해서만은 아쉬움을 금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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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R.I.P, 히스 레저.

PS2=
http://neobiani.egloos.com 에서 줏어온 조커 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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