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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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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좋은 일이 있었다.

 

계기는 아주 단순했다. 팀원 한 분이 마스터링하시는 캠페인에서 플레이하기 위한 새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이러이러한 부분에 있어 고쳐달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거 자체는 RPG하면서 당연히 있는 일이고, 또한 있어야만 하는 일이다. 나도 RPG 하루 이틀 한 게 아니고, 팀원들과 그런 요구를 숱하게 주고받아 왔다. 평소였으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고쳤을 것이다. 그 팀원 분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 머리로는 타당한 지적이라는 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순간적으로 '실 플레이 상에서는 별 문제가 안 될 소소한 사항 같아 뵈는데 몇 번이나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할까' '걍 CP 벌이용으로 안전한 단점을 무난하게 선택한 걸로 보인다고 하셨는데, 지금까지 몇 년이나 같이 플레이하면서 내가 그럴 사람으로밖에 안 보였나' 싶은 생각이 들어 확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피로감에 더해서, '혹시 플레이어 길들이기를 당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솟구쳤다.

 

그래서 욱하는 심정으로, '내가 그렇게 신뢰감 없는 팀원이었나 싶어서 좀 그렇다'고 했다-_-

 

그 분은 친구에게 농담하듯 가볍게 이야기한 건데 내 반응이 너무 격해 당황스럽고 지적이 들어간 거 자체로 섭섭해 하는 건 좀 그렇다...고 하시더라. 댓글로만 이야기를 했지만, 난처함과 불쾌감이 배어 있는 게 느껴졌다.

 

그 분과 평소에 관계가 껄끄러웠던 것도 아니다. 그 분은 RPG에 있어 매우 배울 게 많은 사람이고, 성격도 딱히 모난 게 아니다. 몇 년 동안 매 주마다 같이 플레이해오며 어느 정도 친분도 쌓였고, 한 번은 직접 만나뵈러 대구까지 가서 잘 놀다 오기도 했다.

 

그런데도 내가 그 때 피로감에 더해 그런 불합리한 의심까지 느꼈던 것은.... 전에도 그런 식으로 의견 조율이 길어지다가 서로 약간 감정 상한 일이 몇 번 있었던 데다가 좀 더 근본적으로는 역시... 내가 '사람'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불신은 이제 고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내가 정서적으로 커다란 결함이 있다는 걸 새삼 자각한다.

 

전화해서 따로 사과해야겠다. 받아 줄지는 모르겠지만... 뭐 안 받아 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받아 준다면 뭐, 앞으로는 가끔 그런 피로감이나 의심이 들어도 가능한 잘 해결해 보려고 해야 되는 거고.

 

며칠 전에 그 분과, 다른 팀원들과 같이 RPG하면서 즐겁게 노는 꿈을 꿨다. 그냥 즐거운 수준이 아니라, 진심으로 기뻤다. 깨고 나자, 난 고작해야 꿈 속에서밖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구나 싶어서 하루 종일 지독하게 우울했다. 그런 꿈을 꿨다는 건 아마도, 내가 아직도 진짜로 원하는 게 그런 거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난 그런 게 아마도 절대 불가능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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