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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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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를 하다 보면 '본능적으로 만들어지는 캐릭터'가 있고, '이성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캐릭터'가 있다. 정확히 둘 중 어느 하나의 공정을 걸쳐 만들어진다고 딱딱 갈리는 건 아니고, 어느 정도 양자 사이에 걸쳐 있는 거긴 한데... 짧지 않은 기간 동안 RPG를 하며 적지 않은 캐릭터들을 만들어 오면서, 지금까지 만들어온 캐릭터들을 돌아보자면 크게 봐서 대강 저 두 가지의 경향이 나타나는 듯하다.

 

시작은 양쪽 다 비슷하다. 팀원들 사이에서 '다음에는 무슨 캠페인을 뛰어보고 싶다'라는 이야기가 우선 나오고, 비교적 가볍고 무난한 활극 분위기가 될지 아니면 어둠에 다크하고 비장미(+중2력) 철철 넘치는 분위기가 될지가 대충 정해지고, 대강 무슨 '큰 이벤트'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 추상적으로나마 이야기가 좀 오가고.... 여기까지는 평소와 다를 게 없다. 그런 가운데 '본능적 캐릭터'는 마치 RPG의 신이 계시라도 내려준 것처럼 핵심적인 컨셉이 불쑥 떠오른다. 물론 처음에는 핵심 컨셉 뿐이지만, 거기에 대해 조금만 상상력을 덧붙이기 시작하면 아주 빠른 속도로 면면이 구체화된다. 최근 4~5년 사이에 플레이한 캐릭터들 중에서는 지인이 마스터링했던 OWOD워울프 캠페인의 캐릭터였던 '영월', 세션의 구인 글을 보고 참가해서 6개월 정도 플레이했던 무한경비대 특무부 캠페인의 '강해원', 그리고 지금 토요일 겁스 던전판타지 팀에서 플레이 중인 '하비에르 리베라'가 여기 해당한다.

 

반면 '이성적 캐릭터'는 무슨 큰 이벤트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가 좀 더 진척되고, 좀 더 디테일과 가이드라인이 확고해지는 과정을 쫓으면서 '이러저러한 캠페인이니 이런 부분을 어필할 수 있는 저러한 캐릭터를 만들어야겠다'는 목적 의식이 먼저 생긴 뒤 거기에 맞춰서 만들어진다. 이러한 캐릭터는 처음부터 어느 정도는 기능적 목적 하에 만들어졌기에 아무래도 '애정을 담은 내 캐릭터'라는 감각보다는 게임 토큰으로서의 감각이 좀 더 강하다.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이 카테고리에 속한다. 

 

세션에서 주로 말해지고, 나 자신도 상당 부분 동의하는 부분이 많은(비록 처음에는 극단적인 자아도취형 마스터링을 접하고 그에 대한 반발감으로 시작했지만), '합의에 의한 플레이'에서는.... 아무래도 후자의 방식이 더 적절해 보인다. 합의에 의한 플레이라는 방식이 애초에 성립하게 된 계기는 '마스터의 에고를 충족시키는데 특화된, 다른 플레이어들은 이야기의 핵심 줄기를 진전시키는데 있어서 마스터가 준비해둔 선택지는 고를 수 있어도 어떤 종류의 재해석도 유의미한 입력도 불가능한' 전통적 마스터링의 폐해에 대한 문제의식이었다. 의사 결정의 과정이 투명하다는 것도 그렇고, 모두가 동등하게 참가할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마음에 드는 부분이 많은 플레이 방식인데.... 문제는....

 

 

본능에 의존하여 캐릭터를 만들어서 플레이를 했을 때가 훨씬 더 재미있었다는 거다(예외 케이스가 단 하나 있긴 하다).

 

영월의 경우도 그렇고 강해원의 경우도 그렇고, 지금 플레이하고 있는 하비에르도 그렇고.... 플레이에 몰입한 도중에는 머릿속이 맑아지고,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사건의 인과 관계와 주요 구도가 주르륵 펼쳐진다.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 버퍼링이 걸리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반응하고, 뭐라고 대사를 치고, 어떤 기능을 써야할지'가 매우 빠르게 떠오른다. 다만 배우적 시점이나 인물적 시점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전체적인 시나리오 흐름을 조망하고 어느 부분에서 터치를 해야할지, 어떤 부분이 재미있고 어떤 부분이 아쉬운지, 그러한 것들 역시도 거의 직관적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심지어 주사위조차도 미미하고 확신은 하기 힘든 수준일망정 '해당 상황에서 가장 스토리적으로 그럴싸하게' 나와주는 경향을 보인다. 스스로의 만족도가 높았을 뿐 아니라, 다른 참가자들의 평도 대체로 좋은 편이었고(강해원이나 하비에르는 낯선 팀에 참가해서 만든 캐릭터였으니, '친분 보정'이라고 생각하기도 힘들다). 특히 하비에르는 그러한 '본능적 과정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의 결정판이라고 할 만하다. 보통 RPG를 하며 플레이어가 자기 캐릭터만이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의 캐릭터나 전체적인 시나리오 흐름 같은 것에 관심을 주기가 어렵다는 걸 고려하면 이것은 작지 않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성적 캐릭터 메이킹은.... 주로 금요일 팀 쪽에서 하는 편이다. 팀원들 대부분이 10년 이상 플레이를 해온 베테랑이고, 세션 쪽에도 괜찮은 글들을 많이 쓴 사람들이다. 경력만 길 뿐 허당 기질이 있는 내 입장에 있어서는, 가능한 오래 같이 플레이하면서 배우고 싶은 게 많은 사람들이다. 분명히 그런데...

 

별로 즐겁지가 않다.

 

나름 객관적인 플레이 내 환경에 신경을 쓴다고 썼는데... 만들 때마다 지적이 들어오는 과정이 3~4번 반복되고 나면 분명 그 지적들에 합당한 부분들이 있더라도, 지치게 된다. 감정은 일단 제쳐두고 차분히 논리를 따져보면 그 지적은 대부분 온당하다(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있지만 대체로는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 정도 고쳤으면 괜찮겠지 싶고, 시트에 적혀 있지 않다 해도 플레이 내의 흐름에 따라 캐릭터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달라질 수도 있다 싶은데... 실 플레이 들어가기도 전에 끝없이 말이 나오면 가끔은 약간 욱하기도 하고. 결국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점을 찾아서는(나만 그렇게 생각할 뿐 사실은 다른 팀원 분들이 '양보'한 것일 수도 있지만) 캐릭터를 만들어도 '이렇게 하면 책 잡히지 않을까' '저렇게 하면 앞서 보인 모습과 배치되지 않을까'를 계속 스스로 따지게 되고.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한 소리 안 들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상황 파악이 늦어지고, 자연히 위축이 된다. 무언가 선언을 할 때도 힘이 실리지 않고, 말이 꼬이기도 한다. 한 두 세션이 이런 식으로 지나면서 욕구불만은 조금씩이지만 계속 쌓이고. 금요일 팀 쪽에서 플레이를 하며 '캐릭터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캐릭터가 가진 바 성격이나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에 비해 순간적으로 버럭 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는데.... 지금까지는 막연히 나 자신의 '다혈질'적인 구석이 캐릭터에게 반영되어서 그런 것이리라 여겼는데 천천히 생각해 보니까 플레이를 하면서 계속 누적되어왔던 그런 갑갑함과 피로, 약간의 짜증이 그런 식으로 분출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차이가 비단 캐릭터 메이킹 방식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본능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로 플레이하면 스무스하다'라는 관념은 어느 정도 경험적으로 입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아무래도 좀 미신적으로 느껴져서 스스로가 약간 거부감이 든다. 최대한 합리적인 대답은... '이런 저런 영화나 소설, 만화 같은 걸 보면서 집합을 이룬 개별 요소들이 내 무의식 중에서 헤쳐 모이는 과정을 거친 끝에 어느 정도 대략의 형체를 이뤄 잠재 의식 가운데 묻혀 있다가, 그 형체를 연상시킬 만한 요소가 있는 컨셉의 설정을 접하면 표층 의식으로 떠오르는 것'이겠지. 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지만 않았을 뿐 긴 시간을 두고 내 안에서 형체를 이뤘으니 당연히 직관적인 레벨에서 잘 이해하고 있는 거고.

 

하지만 자기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것과, 그 캐릭터를 잡고 플레이에 집중하고 있을 때의 그 번뜩이는 듯한 감각들이 무슨 상관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이래저래 생각을 해보다 보니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긴 했는데 아무튼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이번 시나리오까지만 플레이를 해보고서 도저히 답이 안 나오면 금요일 팀 쪽 플레이는 한 동안 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성과 감정은 서로 대립되는 게 아니니만큼 막상 팀에서 빠지고 나면 '분명 합의제가 맞는 방향이긴 한데, 내가 합의에 의한 RPG 경험을 쌓을 만한 건 이 팀 뿐인데' '내가 근성이 부족한건가' 싶어서 영 좀 떨떠름할 것 같기도 하지만... 지금은 영 재미가 없다. 분명 실력 좋고, 배울 게 많고, 개인적으로도 같이 플레이하기 힘들 정도로 성격이 모난 것도 아닌 사람들인데... 막상 같이 플레이만 하려고 하면, 왜 이렇게 계속 생각지도 못한 데서 무언가가 툭툭 걸리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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