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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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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19일 아침 7시. 지금 창 밖으로, 운명의 여명이 밝아 오는 게 보인다.

 

5년 전, '그'가 '대통령직'이 아니라 '왕위'에 올랐을 때 나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40년에 걸친 일본의 수탈, 3년 간의 내전, 유럽에서는 수 백년에 걸쳐 이룬 것을 단 몇 십년 만에 이룬 산업화. 한국에서는 그 모든 일들이 너무 빨리 일어났고, 이 나라에서 사는 이들은 진정한 자유를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일그러진 자유의 가호 아래, 거대한 흉조(凶鳥)가 알껍질을 깨고 태어나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사악한 이념'은 아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재화의 사유화를 긍정하고, 보다 많은 사유화를 위한 무한한 경쟁을 인정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욕구를 물질에 종속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자유로운 것은 오직 자본 뿐이게 되는' 현상을 쉽게 허용하게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한 자본주의가 그에 대한 충분한 성찰도 학습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 하에서, 다만 그 풍요로움을 앞세워 한국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인식 가능한 세계의 가능성을 협소하게 만드는 이 나라의 환경에서는 자본주의의 나름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부분도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세속적 부와 안락에 대한 추구로 뒤덮여 버린다. 97년 말의 외환 위기를 거치고,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 생각만큼 만족스럽게 '경제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는 판단은 IMF 체제에 의해 강요되었던 신자유주의를 더욱 격화시켰고 그 기저에 깔려 있는 부와 성공에 대한 욕망, 가난과 실패에 대한 공포는 '그'를 왕좌에 올렸다.

 

'그'는, 이 나라를 살아가는 국민들 대부분의 의식 기저에 깔려 있던 공포와 욕망이 집결되어 탄생한 괴물에 가까웠다. 공포와 욕망은 둘 다 불합리하며, 일종의 광기에 가까운 힘으로 인간의 마음을 지배한다. 그리고 지적이고 체계적인 악의가 아닌 그러한 광기는 예측할 수 없고 끔찍하다. 나는 그의 '읽을 수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두려웠고, 그 후로 5년 동안 그는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 걸쳐서 진정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물들을 낳았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여당의 후보가 다시 '왕권'을 노리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강대한 적이다. 어쩌면 그 포텐셜은, '그'를 능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면에 있어서, 그 후보는 '그'보다는 상대하기 쉬운 적이다.

 

'그'는 한국인의 의식 전반에 또아리를 튼 광기어린 공포와 욕망의 투영이며 그 궁극적인 총화였다. 그리고 비록 5년 전 그 날 다른 후보에게 표를 던지긴 했지만 나 역시 한국인이며, 그러한 공포와 욕망은 어느 정도는 나의 것이기도 했다. 스스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일말의 그 광기 속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상대로 싸워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나는 강하다. 그러나 싸워야 할 적 자체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강함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촛불집회 당시, 일주일에 사흘은 광화문 현장으로 나가 전경들과 대치하면서도 내가 진정으로 맞서야 할 존재는 저들이 아니라는 걸 끝없이 되새기면서, 그리고 그 존재의 실체가 잡히질 않는다는 것에 한없이 불안해했다.

 

이번의 여당 후보는 그 광기어린 공포와 욕망을 자신의 룰로 통제하여 한국인의 정신 구조를 자신의 영혼의 색깔로 덧칠하려고 했던 자의 가장 정통한 계승자다. 그리고 보수의 가면으로 그를 정당화해온 구체제의 의지의 화신이며, 혼란과 불안 속에서 '한국인들에게 민주주의는 맞지 않는다' 내지 '조선놈들은 상전이 있어야 한다'는 식의 자학과 노예근성을 틀어쥐고 그를 지배하려고 하고 있다. 즉, 이 후보는 혈통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그 철권의 의지를 가장 완전하게 이어받은 이이며, '그'와는 달리 명확한 이념적 목적의식과 합리적 접근방침을 갖고 있다.

 

 

읽을 수 있는 적은, 두렵지 않다.

 

 

그리고 지금까지 위에서 길게 쓴 내용이 전부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이유는, "객관적인 '힘'과는 별도로 내가 이해하고, 저항 의지를 더욱 강하게 불태우기 쉬운 상대가 그 후보일 뿐, 그 후보가 왕좌에 오른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한국인들이 '그'로 상징되는 공포와 욕망을 거쳐 그를 통제하는 하나의 권위에 앞으로도 다만 꿇어 엎드려 맹종하겠다는 항복선언"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이 지나고 최악의 결과가 단순한 가능성에서 현실로 빠져 나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강하며, 무엇보다도 '싸워야 할 상대'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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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후보가 패배하고, 내가 마지 못해서나마 찍을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러면 전의를 불태우는 대신, 아주 조금은 기뻐할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씨풋 그래봤자 보수 대통령이잖아, 대기업 위주의 기형적 시장 구조는 어쩔건데? 대미 종속적 경제 구조는 어쩔건데? 강정 마을 해군기지 어쩔건데? 이미 파헤쳐 놓은 4대강 수습은 어쩔건데? 비정규직 문제 어쩔건데? (내 취직과도 연관되어 있는)문화산업 육성은 어쩔건데? 그것들 전부 공약대로 할 수 있겠어? 퍽이나!'라고 불평하겠지(...)

 

 

이젠 창 밖이 완연히 밝다. 슬슬... 씻고 투표하러 나가야겠다. 어느 쪽이 되었건, 어제와는 달라질 내일을 만나러.

 

 

그 내일과는 투쟁심을 끌어 올리며 싸우게 될지, 아니면 못내 껄끄러워하면서도 일단은 안도하며 지켜보게 될지는 모르겠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