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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교수의 주장을 간략히 요약하면, "현실의 불의가 바로 눈 앞에 있는데 소비 자본주의를 미화하는 강남 스타일 같은 노래가 흥한다는 것은 그만큼 값싸고 천박한 사고가 일상화되었다는 의미다" 정도가 될 듯하다. 그것은 썩 틀린 지적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 글은 핀트를 좀 잘못 짚은 것 같다.
저 글에서 박노자 교수가 범하고 있는 오류는, 그러한 인식에서 그치지 않고 '강남 스타일이라는 노래로 대표되는 감각적이고 피상적인 쾌락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들VS송전탑 위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절박하게 투쟁하는 사람들'이라는 프레임을 두고서 전자를 악, 후자를 선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좌파에게 있어, 물신을 극단적으로 조장하는 자본주의는 투쟁과 극복의 대상이다-자본주의가 그 자체로 악랄하고 비인간적인 '악'은 아닐망정-. 내게 있어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강남 스타일을 흥얼흥얼 따라부르는 사람들-한 발 더 나아가, 한국인의 절대다수는 좌파가 아니다. 그 사람들에게 있어 자본주의는 별로 의식할 것도 없이 일상 속에 체화되어 있는 관념이다. 그 체화는 이미 너무나도 뿌리깊어서, 그 병폐마저도 이미 익숙한 삶의 한 단면이 되어 버렸다.
비유하자면 현대의 한국인 일반에게 있어 자본주의는, 눈도 채 뜨지 못한 강아지 시절부터 목에 매여 있던 사슬과 그 사슬이 연결된 개집 같은 거다. 그 사슬과 개집은 그 개의 자유를 빼앗고, 세계를 협소하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그 사슬과 개집이 바깥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온갖 혼란과 무절제의 위험으로부터 개를 막아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좌파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해야 그 개(자기 자신도 그 개의 일부이다)에게 바깥 세상을 보여주고 바깥 세상을 희구하게 할지, 궁극적으로 사슬을 풀고 바깥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할지의 문제다. 어떻게 해야 당장 사슬을 자르고 개집을 태워버릴 수 있을까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집 개들도 모두 저마다의 사슬과 개집에 묶여 있는 현재 상황에서 지나치게 무책임한 짓이다(반대로 제 정신이 박힌 우파라면 어떻게 해야 사슬이 그나마 좀 덜 갑갑할지, 개집을 더 크고 편하게 고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을 지배해 온 앙시엥 레짐은 스스로가 개의 일부임을 거부하고 외부의 주체인 '개 주인'이 되어 자기 이익과 필요에 따라 개의 사슬을 옥죄었다 풀었다가, 개집 지붕에 비가 새도 막았다가 뜯어냈다가를 반복해 왔다. 강남 스타일이라는 노래는, 한국인 일반이라는 개의 목덜미를 깊이 파고들어 있는 값싸고 천박한 자본주의라는 사슬이 참으로 빤딱빤딱하다고 말하는 기계적인 서술에 불과하다. 이 지점에서 나와 박노자 교수의 인식이 갈린다. 박노자 교수의 주장은 '그 사슬이 자기 목을 조르는 것도 모르고 있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나는 개보고 뭐라고 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그 개의 잘못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자기 의사와는 무관히 사슬에 목이 걸렸고 거기에 길들여졌다는 것 뿐이다. 문제는 개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하고 개 주인이 되어서는 철저하게 개를 농락하고 있는 앙시엠 레짐의 유령이다. 좌파 역시도 그 개의 일부다. 좌파가 사슬과 그 사슬의 빤딱거림에 감탄하는 개의 다른 부분들을 욕하려면 최소한 그 사슬을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가 개의 일부임을 거부하고 별개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바로 지금, 박노자 교수가 한국에서 한국인들과 살 부딪쳐가며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저 먼 북유럽 노르웨이의 오슬로 대학이라는 '성역'에서 '타락한 한국사회'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것처럼!-. 이는 곧, 국민 일반보다 한 수 위에서 내려다 보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작태로 이어진다. 만일 그렇게 해서 앙시엥 레짐의 엉덩이를 걷어 차 버리고 사슬과 개집의 통제권을 얻는다 해도 개의 입장에서는 좀 더 관대한 주인으로 바뀌었을 뿐 개 스스로의 발로 바깥 세상의 햇볕을 쬐고 바람을 받고 비를 맞는 것이 아니다.
좌파가 개의 일부인 채- 즉 국민 일반보다 지적으로건 윤리적으로건 우월한 배타적 엘리트가 아닌 대등한 입장인 채로 민주주의를 지키면서, 자본주의라는 사슬과 개집에서 벗어나 바깥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사슬이 빤딱대냐 아니냐를 두고 개의 다른 부분들과 치고 받을 게 아니라 지금의 개 주인인 그 앙시엥 레짐의 유령을 물어 뜯어야 한다. 단 일격으로 숨통을 끊는 건 무리겠지만, 적어도 대단히- 분노와 복수심보다는 공포심을 심어주기 충분할 정도로 아프게.
이제 곧 대선이다. 각 부분들이 모인 '개'의 전체는 대체적으로 지금의 주인을 싫어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은 안전한 사슬 범위 밖 자기 집 안에서 누워 있는 게 아니라 그 사슬 끝을 붙잡고 개 곁에 서서 "좀 느슨하게 해 줄까 말까 우쭈쭈" 거리고 있다. 유령을 물어뜯을 기회는 지금이다.
PS=트랙백을 하려고 했는데... 한겨레 블로그 로그인을 해야만 가능한 모양이다- -a
PS2=박노자 교수의 저 글은 유희 문화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기저에 깔고 있는 걸로 보인다는 것도 거부감이 든다. "활동가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 중인데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여자' 같은 가사가 가당키나 하냐"라는 말은 "북괴의 적화 야욕이 날로 심화되고 있는데 민주주의 따위 얼어죽을"이라는 말과 -한쪽은 '쾌락'를, 다른 한 쪽은 '이념'을 악으로 규정하여 적대시하고 있다는 부분만 제외하고- 논리구조가 똑같다. 춤추고 노래부르면서 투쟁하면 안 되는 건가? 내 개인적으로는 그럴 성격이 못 된다. 그러기엔 난 너무 유머 감각이 없다. 하지만 교조적이고 단선적인 외침으로는 사람들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PS3=나는 좌파이며, 한국과 한국인이라는 개가 개집과 사슬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의 틀을 깨고 바깥 세상으로 나가기를 원한다. 그리고 아득히 먼 훗날 언젠가는 다른 개들도 그러하기를 바란다(그 무렵에는 이미 그러한 정치적 이념들 자체가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주인을 호되게 물어 뜯어준다 해도... 개가 스스로의 자율권을 어느 정도 확보한다 해도, 한국의 좌파 자체가 일본의 그것처럼 사라져 버린다면? 바깥 세상을 꿈꾸고, 계속해서 그 비전을 말할 여지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