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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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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고 몇 자 적는다.

 

한국에서 진보의 입지는 뿌리부터 빈약할 수밖에 없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외세에 의해 종식되고, 역시 외세에 의하여 실질적으로 두 나라로 갈려 서로 죽고 죽여야만 했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자유민주주의에 반대되는 사악한 사상이다'라는 선전 속에서 군사독재가 이어졌다. 이 나라의 국민들은 불안한 정국와 피폐한 일상 가운데서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올바른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충분히 숙고할 여유를 갖지 못했고, 한 번도 스스로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진정한 주체가 될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

 

해방과 정부 수립 이후로, 이 나라의 집권층은 스스로의 권력을 유지하고 그를 공고히하기 위해 다분히 의도적으로 공산주의라는 경제체제와 사회주의라는 정치체제를 동일시했고, 그를 무자비하고 맹목적인 광신일 뿐 더 이상 국가 이념이라고 할 수 없는 '북한 체제'에 등치시켰다.

 

노태우가 물러난 이후 한국의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달성되었다. 그러나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 이후 2012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20년 동안 '그것'은 한국인들의 삶 기저에 깔려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해왔다.

 

'그것'의 첫 형성은 단순했다. 일제 시대, 앞으로 올 세계의 냉전 구도를 대비하여 해방된 조선을 동북 아시아에서의 이념 대리전을 위한 주춧돌로 삼기 위해 음으로 조선의 독립을 지원했던 미국과 소련을 통해 '민주주의'와 더불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이 나라에 들어왔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해방이 되었고, 끔찍한 동족 상잔과 더불어 '북한 체제는 사악한 것이다'라는 인식이 확고해졌다. 이것 자체는 말할 것도 없이 사실이다. 그러나 집권층은 '북한 체제=공산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인식을 의도적으로 조장했고, 여기에서 첫 왜곡이 발생했다. 그 개념 상 근본적으로 성장보다는 분배를, 안전보다는 자유를 중시하는 진보는 애초부터 한국에서 올바른 형태로 성장하기가 극단적으로 어려운 구조가 이 무렵에 이미 형성되었다.

 

군사독재 기간 동안 이 나라의 국민들은 산업화가 가져다 주는 급속한 물질적 풍요와 외형적 성장에 감탄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빨리 변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 가운데 국가주의와 전체주의를 교묘히 심었고, '먹고 살기 위해선 작은 희생은 어쩔 수 없다.'라는 분위기 속에서 두번째 왜곡이 발생했다.

 

박정희는 김재규에 의해 사살당했고, 짧았던 최규하의 대리 통치는 전두환의 쿠데타로 막을 내렸다. 이후 노태우를 거쳐 김영삼이 당선되며,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대의 조류는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람만 바뀌었을 뿐, 표피적으로만 민주화를 성취했을 뿐 그 기저에 깔려 있는 두 차례의 왜곡과 그 가운데서 태어난 '그것'은 건재했다.

 

 

'그것'의 정체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이 나라의 정치적 주도층 가운데 뼛속까지 박혀 있는 승리와 효율에 대한 집착- 한 발 더 나아가, 오직 자기 증식만을 위해 존재하는 권력욕이다. 노골적으로 권위적이고 억압적이었던 군사정권을 종식시킨다는 공통된 대의 앞에서 선과 악은 분명해 보였지만, 막상 그 군사정권이 적어도 겉으로는 사라지고 나자 '그것'은 지금까지 그에 맞서 싸워왔던 이들 사이에서 나래를 펼쳤다. 승리를 위해서는 작은 희생은 어쩔 수 없고, 내부의 사소한 불의는 '적'의 커다란 불의를 깨뜨리기 위해 덮어둬야 한다는 논리가 팽배했다. 그것이 한국 정치계의 현주소다.

 

 

한국의 진보는 약하다. 물리적인 규모나 정치공학적 기술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한 없이 약하다. 애초부터 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보다도 드높이 자유를 노래하고, 생명을 찬양하고, 인권을 관철해야 할 진보가 '승리'를 위해 '그것'에 무릎 꿇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한국에서 진보임을 자처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수없이 패배하고, 수없이 갈등하고, 수없이 좌절하는 것이 현재 한국에서 진보가 나아갈 길이다. 지켜야만 할 가치를 이루기 위해 타협하지 않았다는 긍지를 품고서 죽기 위해. 언젠가 그 먼 훗날, 지금의 패배와 갈등과 좌절들이 진보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초석이 된다는 희망을 품고서 죽기 위해.

 

 

운명의 나라를 그리며, 우울하고 갑갑한 현실 가운데 속해 그와 싸우며 살아 나가는 것.

 

와야만 할 그 날을 위해, 용기를 가지고서 패배하는 것. 

 

 

그것이 한국에서 진보를 자처하는 이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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