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CALENDA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 CLOUD

  • Total :
  • Today :  | Yesterday :



World of darkness는, 근본적인 배경 설정 자체가 상당히 어둡다. '그림자가 길어지는 그곳'이라는 핵심 케치프레이즈에서도 알 수 있듯 WOD의 세계에는 미국이 있고, 자본주의가 있고, 환경 오염이 있고, 정치인과 기업인의 부패가 있고, 양극화가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가 노력을 하지 않아서 가난한 것이며 게으른 자들을 위해 쓸 돈은 없다고 생각하는 20의 사람들과 이 세계가 뭔가 근본적으로 단단히 글러먹은 건 알겠지만 이유는 잘 모르겠고 일단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재수없다는 생각부터 하는 80의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 WOD의 세계는 여러모로 현실과 닮아 있지만 보다 더 어둡고 타락한 세계다. 뱀파이어를 플레이하느냐 워울프를 플레이하느냐 메이지를 플레이하느냐 다른 그 무언가를 하냐에 따라서 주로 부각되는 요소들은 저마다 다르지만, WOD(특히 구버젼)라는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기조는 이렇다.

난 이번 캠페인에서 '합의제' 방식을 채택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텔러는 그를 받아 들였다. 합의제는, 마스터가 단독으로 배경 세계를 만들고 시나리오를 짠 뒤 그를 플레이어들에게 제시하고, 플레이어들은 보다 더 유리한 전개를 취하고 궁극적으로는 해피 엔딩에 도달하기 위해 '퀘스트'를 클리어 하는 전통적인 방식과는 궤를 달리한다.

합의제에서는, 캠페인의 분위기가 어떠하며 그로부터 어떤 종류의 '재미'를 추출해낼 것인지 마스터와 플레이어 간에 공통된 목표를 설정한다. 그리고 게임 도중에 부단한 토론을 거쳐서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떠한 국면으로 장면이 전개되야 더 재미있을지', 그리고 '이 결정이 지금까지 플레이를 해오며 캐릭터들이 드러낸 면면들과 배치되지 않는지'를 결정한다. 물론 이러한 결정이 전투의 승패나 교섭의 결과 같은 것들까지 좌우하지는 못한다. 그렇게 된다면 이것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되며, 탄력성과 상호 작용성이라는 RPG의 가장 큰 재미를 버리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시나리오의 전반적인 성격과 거시적인 방향성은 플레이어들과 마스터가 사전에 정해둘 수 있다(그리고 플레이 도중에도 큰 틀 내에서 지속적으로 수정되고 갱신된다). 전투에서 지면 지는 거고, 교섭에서 실패하면 실패하는 거고, 적의 함정에 걸렸으면 걸린 거다. 그러나 그것들은 1차적인 결과일 뿐이며, 그로 인한 영향은 거시적인 맥락에서 사전에 합의된 '방향성'으로 수렴된다.

합의제 플레이에서는 전통적인 방식과 뚜렷이 구별되는 강점이 있다. 이 체제 하에서는 플레이어들이 마스터의 복선이나 안배가 무엇인지, 어떤 선택지가 '퀘스트 클리어'로 가는 것인지 해골에 쥐나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세계의 많은 부분은 마스터 임의의 뒷설정이나 배후가 애초에 없이 공백으로 남겨져 있으며, 지금까지 어떻게 플레이를 해왔고 앞으로 어떻게 해 갈 것이냐에 따라 채워진다. 이로 인해, '퀘스트 클리어'를 위하여 캐릭터가 그 때의 상황이나 분위기에 맞지 않는 대사나 행동을 할 일도 없어진다. 캐릭터의 패배나 죽음, 심지어 캠페인 조기 종료마저도 마스터와 플레이어들의 합의 하에 임의로 선택 가능한 옵션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 그로써 궁극적으로는 마스터와 플레이어들의 협조 하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서사를 완결한다는 것. 그게 합의제의 이상이다(물론 모든 이상이 그러하듯, 이것은 상당히 이루어지기 힘들다).

다만 이 강점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마스터는 물론 모든 플레이어들이 능동적으로 게임에 참가하며 '이 세계를, 그리고 이 캠페인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이냐'에 대한 부단한 의견 교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플레이어들이 자기 캐릭터의 관점과 입장에만 얽매이는 법 없이 '작가적인 관점'에서 전체적인 서사 전개의 방향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합의제 플레이에서 가장 나쁜 플레이 방식은, 앞으로의 전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지에 대한 고려나 다른 참가자들의 의사에 대한 배려 없이 '내 캐릭터는 원래 이런 성격이야'라고만 하며 멋대로 캐릭터를 움직이는 것이다(두번째로 나쁜 건 '어차피 정해진 거잖아'하면서 안일하게 주사위 굴리라면 주사위 굴리고 적당히 RP하라면 RP하며 '무난하고 평이한' 진행으로만 일관하는 거다). 이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모든 게 마스터의 안배 하에 있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게임하는 게 더 낫다.          

이야기가 좀 샜는데... WOD는, '매우 어두운, 성인 취향의' 게임이다. 캐릭터들은 좌절하고 방황할 망정, 플레이어는 쓰디쓴 독주의 맛을 즐기듯이 그러한 다크함을 즐기는 게임이다. 이것은 WOD를 플레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워울프들은 가이아를 지키고 위버의 그물에 묶여 미치고 타락한 웜을 되돌린다는 고결한 이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워울프들 내부에서도 무엇이 가장 옳은 방법이냐를 두고 의견충돌이 끊이지 않으며, 특히 실버팽과 섀도우로드, 글래스워커와 레드 탈론은 극단적인 대립으로 일관한다. 워울프들이 직면한 가장 큰 적은 미쳐버린 웜이지만, 애초에 그 웜을 미치게 만든 건 위버였다. 오염물질을 뿌리는 펜텍스의 공장을 폭파시키고 자축연을 나누던 PC들은 다음 날 직장을 잃어 버린 아버지가 절망 끝에 가족들을 남겨두고 자살했다는 뉴스를 접한다. 남편을 잃고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힘들지만 행복한 삶을 살던 어머니가 불운한 사고로 포모리가 되고, PC들은 대의를 위해 그를 죽이고, 배후 사정을 알 리 없는 그 자녀들은 실종된 어머니를 찾아 달라고 PC들에게 매달린다. 워울프들의 가장 큰 적, BSD들마저도 위버에 의해 압사하기 직전인 웜을 지킨다는 그들만의 어두운 이상을 위하여 거리낌없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PC들의 앞을 가로막는다.

이것이 WOD, 이것이 워울프 게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이 세계는 어둡고 비참하며, 희망은 너무도 멀리 있다. 그리고 워울프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은, 그 어둠을 '유희의 일환'으로 받아 들인다는 전제에 동의한 이들이다. 그리고 합의제라는 플레이 방식은 그를 즐기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용한 방식이라고 보이며, WOD가 'Table talk role playing game'이 아니라 'Story telling game'이라는 것에도 부합한다고 여겨진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