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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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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원래 이런 종류의 작품들 좋아한다. 멀게는 <1984><멋진 신세계> <우리들>부터 해서 <해리슨 버거론><롱워크>를 거쳐 가까이는 <그림자 아이들><설국열차> <헝거게임 시리즈>에 이르는, 전체주의적인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그에 저항하는(최소한 그러한 체제의 끔찍함과 불합리성은 자각하고 있는) 주인공들이 나오는 작품.

 

그런데.... ....깨놓고 말해서, 이 소설에서 제시되는 사회상은 이런 장르 중에서도 특히 극도의 공포와 암울함을 달리는 <나는 입이 없다, 그러나 비명을 질러야 한다>에서 드러나는 그것에 비하면 그렇게 나쁘지 않아 보인다(내가 온갖 막장의 극한을 달리는 현시창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상대적으로 그렇게 여기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입이...>를 읽고 난 뒤 <1984>를 읽으면 그 세상이 따사롭게 햇볕 내리쬐고 옆에는 얼음 띄운 레모네이드가 놓여 있는 여름 해변처럼 보일 지경인데 이 정도 수준이면 뭐 양호하지(...).

 

그러한 전체주의적 디스토피아 사회가 끔찍한 이유는, 단순히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무자비한 억압 속에서 고통 받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멋진 신세계>의 소마로 대표되는, 현실의 그러한 끔찍함과 불합리성을 최소한 잠시 잊게라도 해주는 오락거리들 덕에 그럭저럭 그러한 억압과 고통을 견뎌가며-심지어는 위로부터의 우민화와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합리화 끝에 아예 그게 억압과 고통이라고 여기지 조차 않으며- 살아가는, 그리고 그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나머지 변혁을 주도하는 주인공들을 불신하고 비난하는 대중들의 모습도 이러한 작품군에서는 자주 묘사된다. <멋진 신세계>나 한 발 더 나아가 <쇼생크 탈출> 같은 작품에서는 그러한 사회의 피라미드 최상층부에 있는-약간 통찰이 부족한 작품에서는 그저 누가 봐도 확실히 나쁜 놈들인 탐욕스럽고 가학적인 소시오패스로만 묘사되는- 지배 계층마저도(<멋진 신세계>에서는 무스타파 몬드 총통, <쇼생크 탈출>에서는 새뮤얼 노튼 교도소장으로 대표되는) 그러한 사회적 시스템이 잘못되었다는 걸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너무나도 견고하게 고착되어 버린 구조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버린 데다, 다른 뾰족한 대안이 없다고 여기기에 다만 지금껏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며 스스로가 지배 계층이라는데 만족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전체주의적 디스토피아 사회가 끔찍한 진짜 이유는, 기층 대중들만이 아니라 그 사회의 최정상에서 군림하는 지배자마저도 변혁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채 그저 현상 유지에만 급급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어떠한 변화도 혁신도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근본부터 차단되어 있으며 그것은 이미 너무나도 공고해 개인적인 레벨의 선의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것, 밑바닥부터 정점에 이르기까지 그 사회에 속해 있는 모든 이들이 체념한 채, 일체의 존엄이나 자율성을 포기하고 오직 스스로를 해당 사회의 존속을 위해서만 기능하는 무한히 대체 가능한 대상물로 격하시키게 된다는 것-철저하게 자발적인 과정을 통해!-. 그것이 이러한 종류의 작품들 속에서 묘사되는 전체주의적 디스토피아가 끔찍한 이유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세상은 그 정도로까지 막장은 아니다. 색깔도 볼 수 없고, 음악도 들을 수 없을 지언정 최소한 텍스트 상으로 묘사되는 바에 의하면-종족 단위가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과연 그렇게 이타적인 존재일 수 있는 지에 대한 의구심이나, 고작 2번까지의 규율 위반만 허용되고 그걸 넘어서면 임무 해제라는 최후의 수단이 기다리고 있는데 오히려 너무 임무 해제가 빈발하는 나머지 임무 해제 조치의 권위가 약해질 거라는 문제를 제한다면- 이 세상의 원로들(, 이 세상의 독재자들)은 진심으로 공공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비록 아이들의 곁에서 항상 그들의 사소한 말과 행동 하나 하나를 감시하고 심판하기는 하지만 그를 통해 얻은 데이터는 어디까지나 사회 구성원 전체의 공익과 안전을 위해 쓰인다. 결정적으로, 이 작품 속의 세상에서는 진정한 감정과 그에 대한 기억들을 보존하고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기억 보유자와 전달자라는 존재가 있다. 게다가 그들은 위험한 이레귤러 취급당하는 일 없이 공식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유사시의 조언자로서 존중받기까지 한다.

 

이러한 작품군의 특성에 비춰봤을 때 기억을 보존하고 전달한다는 이들의 존재의의는, 사회의 폐쇄와 정체, 부패를 막고 변혁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을 남기는 최소한의 보험이라고 할 수 있다. 말로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한다고 하지만, 막상 내용물을 들여다보면 권력과 자본만이 자유로운 권리를 향유하며 전횡을 펼치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내가 보기에 이 작품 속의 세상은...... , 섹스 못하는 것부터 시작해 이런저런 개선이 필요한 요소들이 제법 많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그럭저럭 사람 사는 곳으로서의 최소 조건은 충족하는 사회주의적 공동체로 보인다(책 날개에 보면 작가의 가장 논쟁적인 작품이라고 하는데... 이런 종류의 작품들 속에서 묘사된 온갖 종류의 막장 세상들을 보아 왔고, 건국 이후 반 백 년 세월에 걸쳐 권위주의적 군사 독재와 기업 친화적 경제 구조가 완연히 뿌리내린 한국사회에서 자라온 나로선 이 정도면 무슨 동화 속 세상 같다).

 

정수라의 노래, <! 대한민국>의 가사에서는 한국을 두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우리의 마음 속에 이상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 ‘저마다 자유로움 속에서 조화를 이뤄가는 곳이라고 규정했다. 물론 저것은 이상론이고, 현실은 언제나 이상보다 300만 광년은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 보라. 과연 2014년 현재 한국이 최소한 그러한 이상을 지향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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