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이후, 미국 사회에서는 테러리즘에 대한 광범위한 패닉이 횡행했다. 사이가 좋건 나쁘건, 매일 같이 직장이나 학교에서 마주치던 익숙한 사람들이 어느 날 한 순간, 아무런 전조도 없이 폭발이나 가스, 기타 온갖 수단에 의해 죽어나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고 친구나 연인, 가족이 될 수도 있으며 자신들은 그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대처할 방법도 모른다는 이 집단적 공포는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라크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고 외국인(특히 아랍권 출신 이민자나 무슬림)에 대한 제노포비아를 촉발했다. 사람들은 직장 휴게실에서, 카페테리아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공원 벤치에서 어깨를 옹송그린 채 겁에 질린 시선을 주고받으며 낮은 목소리로 이 막연하면서도 끔찍한, 형체 없는 두려움들을 말했고 그 두려움은 날개를 얻어 미국 전체를 그 불길한 그림자로 뒤덮었다. 정치적으로는 강한 미국을 부르짖는 공화당 내 극우파가 선거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이를 기반으로 조지 부시 주니어 당시 미국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다. 사회적으로도 국가 안보와 사회 질서가 언론자유와 개인의 인권보다 우선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미 정부와, 폭스 뉴스로 대표되는 보수 언론은 테러와의 전쟁을 외치면서 싸워야 할 외부의 적을 찾아 다녔고 정부 기관은 은밀히 자국 내 국민들에 대해서까지 대규모 도감청을 실시했다. 그러나 조지 부시 주니어 당시 대통령이 ‘명백하고 현실적인 위협’이라고 거듭 강조했던 대량 살상 무기는 이라크에서 끝내 발견되지 않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참전 군인들의 피로와 테러 용의자들에 대한 무차별 체포 및 고문이 언론에서 이슈가 되며 반전 여론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포와 불안, 피로가 만연해 있던 당시의 미국 사회의 면면을 살펴보면 오히려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역설적으로 오사마 빈 라덴의 의도가 그대로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빈 라덴은 결국 대 테러 특수부대 데브그루 팀에 의해 사살되었지만, 2014년 현재에도 여전히 알 카에다로 총칭되었던 테러리즘의 세포 조직들은 아랍권과 아프리카 인근 지역에 흩어져 있고 미국 내에서도 지난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깊이 뿌리를 내린 이 형체 없는 두려움은 채 걷히지 않고 있다. 그러한 현재 시점에서, 이 영화는 슈퍼 히어로 물이라는 외피를 통해 ‘미국이 추구해야 할 정의’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캡틴 아메리카(이하 ‘캡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배후에서 세계 정복을 획책하고 있던 비밀결사 ‘하이드라’에 대항해 싸운 적 있는 전쟁영웅이다. 용기와 애국심, 악에 맞서는 순수한 열정과 희생정신은 갖고 있지만 몸이 너무 허약하여 전쟁에 나갈 수 없었던 그는 그의 정신력을 높이 산 군 소속의 과학자 에스카인 박사에 의해 인간의 신체적 잠재능력을 극한까지 이끌어내지만 내면의 선과 악 역시 극단적으로 증폭시키는 약물을 투여 받아 초인 병사가 되어 싸우게 된다. 캡틴의 탄생과 하이드라와의 싸움을 묘사한 영화 <퍼스트 어벤저>에서 그는 하이드라의 수장 레드스컬을 쓰러뜨리지만 남극의 얼음 속으로 떨어져 동면 상태에 빠지고, 이후 세월이 흐른 현재에 깨어나서는 UN 산하의 국제 안보기관인 ‘실드’의 국장 닉 퓨리에게 스카웃된다. 이후 영화 <어벤저스>에서의 사건을 거치며 현재의 세계에 점차 적응해 가지만 그는 여전히 구식 도덕관념과 사고방식에 매여 있는,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게 변해 버린 현재의 세상 속에서 고독과 소외감을 떨치지 못하는 과거의 영웅이다. 21세기의 트렌드에 맞지 않는 고지식한 도덕성과 성실함, 그리고 애국심이 캡틴의 정체성이다.
이 시점에서 대개의 사람들이 흔히 하기 쉬운 오해는, 캡틴이 9.11과 테러와의 전쟁 이전부터 미국의 대외정책 근간을 이뤄왔던 오만한 제국주의를 대변하는 히어로라는 것이다. 하지만 캡틴이 진정으로 상징하는 것은 그보다 한 발 앞선, ‘순수한 의미에서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미국의 이상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 영화 초반, 성장환경부터 시작해 정치 성향, 학벌, 대인관계 등을 분석하여 ‘앞으로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를 추려내어 고도 3000피트에서 정밀 타격한다는 계획인 프로젝트 인사이트(작게 보면 테러와의 전쟁 당시 미국이 주장하던 ‘공세적 방어’ 개념에 대한 은유가 명백하며, 궁극적으로는 대의를 앞세운 통제와 감시, 억압 자체라고도 볼 수 있다)를 두고서 이것은 정의가 아니라 공포라고 비판하는 장면에서 일차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가장 극대화되는 장면은 중후반에서 드러나는, 실드 내부에 배반자가 있는 수준을 넘어서 실드 자체가 하이드라에 장악되었다는 반전 부분이다. 하이드라의 간부는 말한다. 자유를 강제로 빼앗으려고 하면 저항하기에,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유를 포기하게끔 만들었다고. 이것은 <어벤저스>에서, 독일에 간 로키가 사람들에게 ‘자유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겠다’ ‘자유는 가장 위대한 거짓말’이라고 조소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겁에 질려 있던 사람들 가운데서 한 노인이 일어나 당신 같은 자에게 무릎 꿇지는 못하겠다고 선언한다. 독일이라는 장소와 그 노인의 나이 대를 고려해봤을 때 그 노인은 아마도 젊은 시절 독일군으로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그가 로키에게 무릎 꿇지 않는다는 것은, 두 번 다시 그러한 기만과 억압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장면을 통해, 비록 로키와 하이드라는 서로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그 방식에 있어서의 유사성을 통해 결국 나치와 그 배후에서 암약하던 하이드라가 어떤 식으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하는지가 상징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캡틴에게 있어서 실드라는 조직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영화만 봐서는 알기 어렵지만, 설정 상 실드는 캡틴이 남극에서 실종되어 잠든 이후 그의 상관이었던 체스터 필립스 대령과 친구 하워드 스타크, 그리고 연인 페기 카터 셋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조직이다. 엄격하지만 포용력 있는 아버지 같았던 상관, 버키 반즈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나 친했던 친구, 무엇보다 사랑했던 여자까지 해서 셋이 남긴 유산이나 다름없는 실드가 한 때 치열하게 싸웠고 말 그대로 목숨과 바꿔 파멸시켰다고 여겼던 적대 조직의 꼭두각시가 되어 버렸다는 상황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드가 하이드라에 의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었다고 판단한 즉시 조직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사람들에게도 그를 따라달라고 설득하는 것은 보통 용기나 도덕성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캡틴은 보수적인 인물이며 그 사고방식 역시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미국적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지언정, 미국의 오만한 패권주의적 질서를 긍정하는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그를 적극적으로 혁파하기 위해서 싸우고 사람들의 마음을 한데 묶어 명확한 대의와 이상으로 이끌어 나가는- 개인의 무력이라는 면에 있어서는 그보다 훨씬 강한 토르나 아이언맨 등과 비교해도 전혀 슈퍼 히어로라고 부르기가 어색하지 않은 영웅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올바른 보수라면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