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들리 장갑차의 후방 셔터가 열리고, 여남은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전원 리시버를 끼고 방탄 조끼를 걸친 채 라이플을 들고 있었지만 파벨 박사의 시선을 가장 먼저 잡아끈 것은 그들 모두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종 구성에다가 연령대도 각양각색이었다는 점이었다. 흑표범을 연상케 하는, 군복 차림을 한 날렵한 체구의 젊은 흑인이 있는가 하면 이제 막 IT 회사 같은 곳에서 퇴근하던 것처럼 정장을 입고 안경을 낀 40대 백인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미국 뉴욕의 뒷골목에서 마리화나라도 한 대 피우다 온 듯한, NBA 져지의 레플리카와 헐렁한 트렁크를 걸친 뮬라토 청년도 있었고, 등산복을 걸친 50대 정도의 동양인 남자도 보였다.
하나하나 뜯어보자면 별 문제 없어 보이지만 한 군데 모아 놓으면 그 엄청난 부조화가 잦아내는 위화감에 지나가는 사람 누구나 돌아볼 만한 기묘한 멤버들이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바닷바람이 파도와 맞물리듯 착착 맞아 떨어졌다. 잘 갈아진 한 자루 칼을 연상케 하는 조용히 가라앉은 눈빛과 수백 번의 연습으로 합을 맞추기라도 한 듯 딱딱 맞는 손발. 그들 중 넷은 라이플을 어깨에 견착하고 장갑차 양쪽으로 둘씩 흩어져 주변을 경계했고, 하나는 셔터 옆에 보초처럼 섰다. 부조화 속의 조화라는 문장이 절로 떠오르는, 그 조직적이고 절제된 움직임은 명백히 군대를 연상케 했지만 그 절도 있는 움직임들 너머에서는 무수한 훈련과 통제를 거쳐서도 완전히 억누를 수 없는 거친 무언가가 약동하고 있었다. 동양인 남자가 다가와, 얼떨떨해하고 있던 파벨 박사의 팔을 잡아채서는 거칠게 장갑차 안으로 데려갔다. 나머지 5명은 바깥에서 대기했고, 후방 셔터가 닫혔다. 동양인 남자는 파벨 박사를 내던지듯 거칠게 시트 한쪽으로 떠밀고서는 포수석에 앉았다. 상부 해치를 닫고 실내로 내려와 차장석에 앉은 베인은 팔걸이에 얹혀 있던 리시버를 둘러쓰고는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타겟 확보 완료. 브라보 팀, 연구소 경비 병력 제압은 어떻게 되가나? 찰리 팀은 퇴로의 안전을 유지해라!”
비좁은 브래들리의 실내 공간. 시트 구석에 내던져진 파벨 박사는 얼떨떨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윤활유 냄새와 거친 사내들의 땀 냄새가 뒤섞인, 뭐라 형언하기 힘든 악취가 코를 찔렀다. 일촉즉발의 긴장된 대기가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군 경험이 없는 파벨 박사였지만, 지금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이곳은 전장이라는 것을.
“꽉 잡으쇼, 박사!”
텁수룩하게 턱수염을 기른, 프랑스 어 억양이 강한 러시아 어로 조종수가 파벨 박사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괴물 같은 신음 소리와 함께 장갑차가 선회했다. “으악!” 파벨 박사는 비명과 함께 한 바퀴 굴러서는 반대편 구석에 강하게 부딪쳤다. 손을 뻗어 아무거나 꽉 움켜쥔 채 기도문을 중얼대는 파벨 박사를 흘낏 돌아보며 조종수가 피식 웃었다.
“강철 운구차에 잘 오셨수다, 정신 단단히 붙잡으라고! 뭐, 재수가 없으면 어차피 조만간 뒈지겠지만!”
쿠르르릉. 한번 크게 덜컹거리는 걸 느끼며 파벨 박사는 눈을 꽉 감았다. 혼란에도 불구하고 의구심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들의 목적은 노심의 코어와 수식이 담긴 내 노트북의 하드디스크 아니었나? 대체, 왜 나를?
“벨트를 매라.”
베인은 짧게 명령했다. 정신을 수습하느라 한 타이밍 늦게서야 그 말이 자신에게 한 것임을 알아차린 파벨 박사는 시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허둥지둥 벨트를 매었다. 그런 그에게 무언가 길쭉한 물건이 날아들었다. 얼떨결에 그걸 받아 든 박사는 기겁했다. AK-74 돌격소총이었다. “전 이거 쏠 줄 모릅니다! 호신용 권총 사격 솜씨도 형편없다고요!” 그러나 베인은 박사의 절규에 가까운 말을 무시하고서는 브래들리의 토우 미사일 발사관에 보관탄을 재어 넣으며 명령했다. 발사관과 이어진 송탄 벨트가 나직한 기계음을 울리며 회전한다.
“모두 철수한다! 가도에서 합류해서, 장비를 파기하고 거기서부터는 숨겨둔 차량으로 항구로 간다!”
텁수룩한 수염의 조종수가 흘깃 베인을 돌아보며 보고했다.
“대장, 예정보다 작전 수행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SVR이 냄새를 맡기까지 5분도 안 남았어요!”
“플랜 B로 이행해!”
“프, 플랜 B 말씀입니까?”
조종수가 약간 말을 더듬었다. 아까 파벨 박사를 데리고 들어온 이후 한 마디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동양인이 포수석에서 대신 리시버에 딸린 마이크에 대고 외쳤다.
“찰리 팀에게 전달한다! 타이밍이 나쁘니, 여기서 시간을 끌다 모두 죽으라는 명령이다!”
조종수는 잠시 눈을 꾹 감았지만, 그 뿐이었다. 조종수는 장갑차를 거칠게 전진시켰다. 콰르릉! 장갑차가 다시 한 번 요동을 쳤다. 토기가 치밀어 오르는 걸 참으며 파벨 박사는 옆으로 몸을 돌려서는 측방 관측창으로 바깥을 흘깃 내다보았다. 허공에 떠 있던 전투 헬기 한 대가 길게 불꽃의 꼬리를 달고 날아든 스팅어 미사일에 명중당해 폭발하는 것이 보였다. 베인이 조종수에게 명령했다.
“지금은 시간의 확보가 최우선이다, 그레고리. 앞에 걸리는 건 전부 뭉개고 돌진해!”
“넷!”
콰아아아---! 격렬한 엔진음과 함께 총중량 27.2톤, 최대출력 600마력의 강철의 야수가 돌진했다. 이들은 진짜 뭘 하는 자들인 걸까, 왜 날 납치한 걸까. 엄청난 요동과 귀가 먹먹해지는 소음 속에서 파벨 박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
그것은 항구라기보다는, 시골 마을의 강변에 설치된 부두에 더 가까웠다. 파벨 박사를 태운 브래들리는 이 항구에서 5Km 가량 떨어진 한적한 가도 기슭에서 버려졌고, 그 후 베인은 근처에 세워둔 픽업 트럭으로 박사를 데리고 이 부두까지 왔다. 파벨 박사는 콜록대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벽 하늘은 두텁게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고,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굴려졌지만, 그는 여기가 어디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앞에서 시커멓게 흐르고 있는 큰 강은 우크라이나 전역을 뒤져봐도 단 하나 뿐이다. 저 먼 북쪽 국경 너머, 벨로루시에서 발원하여 우크라이나 전토를 양분하며 흐르는 이 강은 키예프 시와 체르카시, 자포로지에와 니코폴을 거쳐 크림 반도 서쪽의 흑해로 이어진다. 그리고 강의 넓이와 물살로 보아 꽤나 하류가 분명했다. “예정대로다, 이 날씨라면 인공위성을 통한 추적은 불가능 할테지. 서둘러라!” 베인은 동행한 조종수-그레고리라고 불린-와 50대 동양인에게 파벨 박사를 잡고 있도록 지시한 후 부두에 접안되어 있던 보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레고리가 물었다.
“대장, 다른 녀석들은 아직 안 왔는데요. 바로 출발하실 겁니까?”
베인은 대답 대신 보트 난간에 한 손을 짚고서는 그 거구로는 상상도 되지 않는 날렵한 동작으로 몸을 날려 갑판 위에 올라섰다. 갑판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파리한 인상의 청년이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베인에게 물었다.
“이대로 최고속력으로 공해까지 나가서, 거기서 대기하고 있던 ‘파도 질주자’ 호에 인계하는 걸로 제 일은 끝. 맞지요?”
“물론. 시동은 걸어놨겠지?”
“네!”
베인은 돌아서서는 박사 쪽을 향해 손짓했다. 반쯤 질질 끌다시피 조종수와 동양인이 박사를 데려와서는 거친 손놀림으로 그를 보트 갑판에 던져 넣고는 자신들도 보트에 올랐다. 청년은 힐끗 박사 쪽을 돌아보더니 입술을 한 번 핥았다.
“저,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됩니까? 어, 전 너무 오랫동안 대장 밑에서 일했어요. 다르게 사는 방법 따윈 모르겠고요. 저, 제가 별로 똑똑한 것도 아니고 늘 실수만 하고 대장 발목만 잡는 쓰레기긴 하지만요. 어, 이미 끝난 이야기인 것도 알고, 대, 대장이 같은 말 반복하게 하는 것 싫어하시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저기, 전 조금이라도 더 대장과 같이….”
베인의 억센 손이 청년의 목울대를 움켜쥐었다. “커, 크헉!”
“닥치고 출발해. 네 놈은 이제 쓸모가 없다고 했을 텐데.”
베인은 손을 놓음과 동시에 청년의 가슴팍을 억센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억!” 청년이 구겨진 휴지조각처럼 보트의 조종실로 던져졌다. 와장창. 청년은 쿨럭 대면서 눈물어린 시선으로 베인을 올려다보며 발악하듯 외쳤다.
“이건, 너무 하잖아요 대장! 처음 만났을 때 그랬잖아요, 자신만 믿고 따라오라고! 그런데 아프리카다 남미다 중동이다 온갖 곳을 돌아다니면서 전 평범한 시민으로 사는 법 따위 배우지도 못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와서 제가 쓸모가 없다고요?”
베인은 그를 무시하고 선실로 들어갔다. 대신 동양인이 조종실로 들어가더니 청년의 가슴팍을 짓밟듯이 한 차례 걷어차고는 등산조끼 안쪽으로 멘 홀스터에서 마카로프 권총을 뽑아들어 그의 머리를 겨누고 입을 열었다. 약간 서툰 러시아어였다.
“대장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셋 셀 때까지 일어나 배를 출발시켜.”
“킴 형님! 형님까지….”
“하나.”
철컥.
“형님, 우리 친했잖아요! 저만 그렇게 생각한 거에요?”
“둘.”
“아, 알았어요!”
청년은 사색이 되어 콜록대면서도 비틀비틀 일어나 조종석에 앉았다. 부르르릉, 텅텅텅텅. 보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킴이라고 불린 동양인은 마카로프로 그의 뒷통수를 겨누었다.
“조금이라도 늦장 부린다 싶으면 쏘겠다.”
“크흑….”
청년은 울상을 하고서도 능숙하게 손을 움직였고, 보트는 거친 파도를 가르며 빠르게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파벨 박사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그걸 바라보았다. 머릿 속이 어지러웠다. 베인은 왜 자신을 납치한 걸까? 대체 이제 어디로 가는 거지? 보트를 모는 저 젊은이와 베인은 무슨 관계인걸까? 보아하니 베인의 부하인 모양인데. 조종석 뒤에 서서 한 손에 쥔 마카로프로 청년의 머리를 겨누고 있던 킴은 조끼 주머니에서 안경 케이스만한 은색 갑을 꺼내 파벨 박사를 잡고 있던 그레고리에게 집어던졌다.
“아아, 슬슬 시간이 되긴 했구만. 어이 킴, 좀 봐주라고! 보트 몰던 중 심장마비라도 일으켜 뻗어 버리면 우리만 손해라고!”
그레고리는 한 손으로 그걸 가볍게 낚아채고는 외쳤다. 킴은 냉랭한 시선을 돌려 조종수를 단 한 번 흘깃 바라봤다. 그 싸늘한 눈빛에 파벨 박사는 좀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레고리는 유들유들하게 미소 지으며 그 시선을 받아넘겼다.
“대장 명령이 있잖아? 웬만하면….”
“입 다물어.”
“…아차.”
파벨 박사를 잡고 있던 그레고리는 어깨를 으쓱한 뒤 박사를 먼저 선실로 밀어 넣고는 자신도 따라 들어왔다. 찰칵.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파벨 박사는 한숨을 푹 내쉬다가 비로소 자신의 전신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는 것, 그리고 문이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자비한 강바람이 실내로 새어들고 있으며 그것이 무시무시하게 차갑다는 것을 인식했다. 맞은 편에 앉은 베인은 비좁은 선실이 화려한 대저택의 거실에 놓인 소파라도 되는 듯 편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지만, 박사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대장, 이것을.”
그레고리는 킴에게 받은 은색 갑을 정중하게 베인에게 내밀었다. 묵묵히 그를 받아든 베인은 갑을 열어, 그 안에 가지런히 놓인 10여 개의 작은 앰플들 중 하나를 집어 든 채로 손을 코와 입 주변을 뒤덮은 마스크로 가져갔다. 찰칵, 찰칵, 탁. 굵은 손가락이 놀라울 만큼 우아하게 움직이고, 해골의 턱이 벌려지듯 마스크 일부가 열렸다. 실내등을 켜지 않아 선실 안은 캄캄했지만, 파벨 박사는 마스크 안쪽으로 살짝 드러난 베인의 입술과 턱, 코에 이르기까지의 살가죽이 모조리 벗겨져 있고 근육과 턱뼈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걸 흘깃 볼 수 있었다. 베인은 마스크 안쪽에 삽입되어 있던 빈 앰플을 뽑아내서는 창문을 살짝 열어 그걸 난간 너머 강에 던져 버리고, 그 자리에 방금 꺼내든 새 앰플을 끼워 넣은 뒤 다시 마스크를 닫았다. 철커덕.
“왜 그렇게 멍하니 서 있나, 박사. 앉지 그래.”
베인은 놀랍게도 유쾌한 어조로 박사에게 말을 건넸다. 박사는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아서는 옆에 구겨져 있던 담요를 집어 어깨에 둘렀다. 식은땀이 급격히 마르면서 얼어붙을 듯한 추위가 전신을 파고들었다.
“춥겠지만 한 두 시간만 참게나, 박사. SVR의 명령을 받은 오뎃사 해안 경비대가 지금 우리 뒤를 쫓아오고 있거든. 적외선 탐지에 안 잡히게 엔진에는 배기열을 급속 냉각하는 설비를 해뒀지만, 공해로 나가 배를 옮겨 타기 전까진 불을 피울 수 없어서 말이야.”
“SVR이라면… KGB에 전신을 두고 있다는, 러시아 해외 정보국 말인가? 놈들이 왜 우리를 쫓지?”
아차. 질문을 한 다음 순간 박사는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베인은 그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방금 ‘당신들’이 아니라 ‘우리’라고 말했지 박사? 그렇다는 건, 우리는 이제 공동 운명체라는 사실을 댁이 마음 속으로 받아들였다는 걸로 생각해도 되겠지? 안 그런가?”
박사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몸을 최대한 옹송그렸다. 속이 부글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뱃멀미가 일어나려는 모양이었다. 그레고리는 그런 박사를 바라보며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베인이 제지했다. “직접 설명하겠다, 우리 귀빈에게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겠지.” 그러자 그레고리는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옆에 굴러다니던 망원경-적외선 야시 장비가 달린 최고급품이었다-을 집어 들어 눈 가에 갖다 대고선 창밖, 보트 뒤쪽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베인의 나직한, 약간 독특한 억양-지금 들어보니 남미 억양인 듯했다-의 러시아어가 박사의 귓전을 두들겼다.
“우선, 이렇게 거친 방법으로 데려오게 된 것을 사과하겠네 레오니드 파벨 박사. 더불어, 핵융합로 노심의 코어와 팔라듐 동기화 수식이 필요하다는 거짓말을 한 것도.”
“역시… 거짓이었군. 하지만, 왜 날 납치한 거지? 인신매매라도 할 셈인가? 나보다는 그게 훨씬 더 팔아먹기 쉬울 텐데.”
박사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물으려고 노력했지만, 격렬한 추위에 이빨이 마구 부딪치는 바람에 자신이 듣기에도 그 음성에 위협적인 기운은 전혀 없었다. 차라리 들고양이가 쉭쉭거리는 게 더 무섭겠군.
“그건 곧 알게 될 게야. 하지만 자네가 궁금해 할 다른 한 가지 정도는 지금 답해줄 수 있어, 박사. 우리는 ‘파도 질주자’ 호로 갈아탄 뒤,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간다. 최종 목적지는….”
베인의 눈이 웃는 듯 가늘어졌다.
“웨인 가문의 영지, 고담 시.”
“고, 고담이라고?”
박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평생을 연구에만 바쳐 온 그도 그 이름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뉴욕과 뉴저지 사이에 있는, 5개의 거대한 다리를 통해 육지와 연결되어 있는- 5개의 섬으로 이뤄진 인구 3천만의 대도시. 현대 자본주의의 모든 타락과 부패들로 쌓아 올려진 바벨탑. 바깥 세상과는 반쯤 단절되어 있다시피한 연구소 내에서도 미국의 고담 시가 갖는 이미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기업인들의 탈세와 주가 조작, 납품 비리, 꼬리를 무는 조직범죄와 환경오염의 온상 그 자체였다. 4년 전, 세간에는 조커라고 알려진 한 미치광이 테러리스트가 두 척의 페리 선에 나눠 탄 고담의 시민들과 죄수들에게 죄수의 딜레마를 연상케 하는 모종의 사회학적 실험을 시도하려 했지만 ‘백기사’ 하비 덴트 검사의 노력으로 결국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 조커는 아캄 정신병원에 수감되었지만 그 직후 배트맨이라는 자경단원에 의해 하비 덴트가 결국 살해당한 이후, 매스컴에서는 대오각성한 고담시경의 경찰들이 하비 덴트의 유지를 이어받아서는 범죄 소탕에 매진한 끝에 조직범죄를 대부분 일소했다고 보도되고 있었으나 파벨 박사를 비롯한 연구원들에게 있어서는 냉소적인 농담 소재에 불과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본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데다 냉전이 끝나고 맥도날드와 코카콜라가 들어온 지도 20년 이상이 지났지만, 여전히 파벨 박사 자신을 비롯한 연구원들의 사고방식은 공산주의적 관념 내에서 머무르고 있었고 ‘미국적’인 온갖 종류의 화이트칼라 범죄와 그러한 범죄를 끝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물신을 조장하는 자본주의적인 탐욕의 사슬은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고담의 시민들에게….”
베인의 음성에 열기가 깃들었다.
“진정한 자유를 보여줄 것이다. 온갖 상표와 일상의 편리함이라는 화려한 족쇄가 없는 세상. 정부와 대기업이 쌓아올린 알량한 법과 제도, 도덕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들이 스스로의 눈을 가리고 있다는 것조차도 깨닫지 못하게 된 자들에게 진실을 보여줄 것이다. 지옥과 같은 공포와 혼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끝에 존재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일 거다.”
베인의 커다란 손이 파벨 박사의 어깨를 붙잡았다. 강력한 손길이 강철 덫처럼 박사의 살 속을 파고들었다. 박사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박사, 자네가 우리와 거래를 하려고 한 목적이 뭐였지? 자네와 자네의 동료들이 모든 걸 바쳐 이룩한 연구 성과를 러시아가 착복하게 두느니, 차라리 그걸 우리에게 팔아넘겨 세상에 퍼뜨리려고 한 것 아니었나?”
“난 자네들이 그러리라고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어. 다만… 러시아 놈들이 엿 먹는 걸 보고 싶었을 뿐이야.”
박사는 대답하면서 씁쓸한 자괴감을 느꼈다. 처음 베인과 그의 부하들에게 접촉했을 때, 자신은 만인을 위해 쓰여야 할 신의 힘이 정치 논리와 막후싸움의 카드로 전락하는 걸 막고 세계에 그를 퍼뜨림으로써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되자, 비로소 박사는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하던 자신의 본심을 알 듯했다. 조국을 배반하고, 자신의 가족들이 방사능 속에서 타 죽어가게끔 방치한 러시아에 대한 복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대의가 아니라 고작해야 개인적인 원한의 해소에 불과했던 것이다. 소인배구나, 나란 인간은.
“해상 경비정들은 더미로 준비해 둔 다른 보트들을 쫓아갔습니다, 대장의 계획대로입니다. 지금 우리는 공해 위고, 곧 랑데뷰 포인트에 도착합니다.”
망원경과 계기판을 번갈아 들여다보던 그레고리가 보고했다. 베인은 고개를 돌렸다.
“경계를 풀지 마라. 놈들 입장에서 봤을 때 손실은 연구소 경비병력 몇 명 죽고 파벨 박사 하나를 납치당한 것뿐이니 적극적으로 추적하지는 않겠지만 만일이라는 게 있으니까. 다른 녀석들에게서 연락은 왔나?”
“즉시 확인하겠습니다.”
“아니, 넌 감시를 계속해라. 킴, 브라보 팀에 연락해 상황을 파악해! 공공 주파수를 써라, 압도적인 통신량 가운데 숨는 거다!”
공공 장파 주파수는 통신 범위가 좁고 노이즈가 심하기 때문에 경찰이나 군대의 비밀 통신은 대체로 전파를 지구 전리층에 여러 번 반사시킴으로써 멀리까지 통신이 가능한 단파에 주로 의존한다. 하지만 그 말은 곧 단파를 사용하는 절대 통신량 자체가 적으며 단파 대역만 집중적으로 감시하면 수상한 통신을 잡아내는 게 어렵지 않다는 의미기도 했다. 물론 암호화가 되어 있지만 슈퍼 컴퓨터의 알고리즘을 동원하면 시간이 걸릴 뿐 현존하는 어떤 암호 체계도 언젠가는 깨뜨릴 수 있다. 그러나 장파 대역은 좁은 통신 범위 안에 온갖 TV와 라디오 전파가 한데 뒤섞여 거대한 노이즈를 구성하고 있으며, 감시하는 입장에서는 그 중 유의미한 정보를 잡아내는 것이 극히 어려웠다. 비유하자면 단파를 통한 비밀 통신은 넓은 숲 속 어딘가에 자물쇠가 걸린 박스를 잘 숨겨두는 것과 비슷했다. 뒤져야 할 범위는 넓지만 찾아야 할 목표는 이질적이고 명백하다. 그러나 장파 가운데 정보를 흘려보내는 것은 영미 문학 소설책들로 가득 차 있는 작은 방 속에 표지를 위장한 단 한 권의 러시아 문학 소설책을 몰래 섞어두는 셈이었다. 뒤질 범위는 좁지만 찾아야 할 목표는 배경 가운데 뒤섞여 있다. 어떤 주파수를 잡아내야 하는지에 대한 기밀 유지만 확실하다면 공공 장파 주파수 가운데 정보를 섞어 흘려보내는 게 상황에 따라선 훨씬 나을 수도 있었다.
조종석에서 청년에게 마카로프를 겨누고 있던 킴이 선실로 들어와서는 그레고리의 옆자리에 앉아 무전기를 집어 드는 걸 흘깃 본 베인은 천천히 박사를 향해 말을 이었다.
“당신에 대한 조사는 이미 해뒀어. 우크라이나 프리피야트 출신에… 체르노빌 발전소 사고 때 부모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여동생을 잃었지? 그리고 러시아 정부는 외면했고.”
“…그렇소.”
박사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베인의 손아귀에서 힘이 약간 빠져나갔다.
“내 부하들 중에도 비슷한 과거를 가진 녀석들이 많아. 그레고리만 해도 아버지가 독소전에 참전한 용맹한 군인이었지만 정치장교에게 찍히는 바람에 반동 혐의로 굴라그에 끌려갔다가 형벌 부대에 배속되서 전사했지. 전쟁 후 친절한 양부모에게 입양됐지만, 그 양부모도 몰래 서방권에서 들여온 금서를 읽다가 KGB에게 들켜 ‘실종’되었고.”
“거 대장, 쪽 팔리게 새삼 그런 이야기는 왜 합니까? 우리 중 사연 없는 놈이 어디 있다고.”
그레고리가 이쪽을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베인은 이제 박사의 어깨에 가볍게 한 손을 얹어둔 채, 푸른 눈으로 박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도 순진한 사람은 아니니 빈 말은 않겠다, 박사. 내 계획을 위해선 유능한 핵물리학자가 필요했어. 하지만 굳이 당신을 고른 건 당신의 분노와 원한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야.”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혁명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거요? 그것이 고담의 시민들에게 자유를 보여준다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박사는 불신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사실은 두려웠다.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해도 위축이 될 정도의 거구에 우람한 근육, 주변을 찍어 누르는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 하지만 자신을 속여서 납치했다는 것과 그 진의가 아직 불명확하다는 것, 그 두 가지 사실은 고분고분하게 상황에 순응할 생각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나, 생각보다 강단 있구나. 당장 바다에 던져질 수도 있는데.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박사는 베인을 노려보려고 했다. 베인의 눈이 다시 한 번, 미소 짓는 듯 가늘어졌다.
“저, 저기요? 이, 이제 랑데뷰 포인트에 도착했습니다 대장! 배가 보여요!”
조종실에 들어가 있던 청년이 몸을 돌려 선실로 연결되는 쪽창을 열고 말했다. 베인은 몸을 일으켜 갑판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아직 계획의 구체적인 사항을 설명해 줄 수는 없겠군. 우선 따라오게, 박사.”
말 없이 신경질적으로 무전기를 조작하던 킴이 리시버를 벗고는 옆에 놓여 있던 AK-74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레고리도 망원경만을 챙기고선 몸을 일으켰다. 휘우우우우ㅇㅇㅇㅇ-! 엄청난 바닷바람이 베인을 쫓아 나가려던 박사의 깡마른 몸을 때렸다. 박사는 이를 악물고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했지만 허리가 휘청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박사를 베인의 커다란 손이 붙잡았다.
“대, 대장!”
보트를 몰고 온 청년이 울상을 지으며 베인에게 다가섰다. 베인은 돌아보지도 않고, 저만치 보이는 배를 향해 섰다.
“부탁입니다. 제발, 저도….”
퍼억.
베인은 순간적으로 몸을 돌리며 팔을 몸 바깥으로 휘둘러, 묵직한 주먹의 위쪽 검지와 중지가 튀어나온 부위으로 그의 명치를 후려쳤다. “……!” 원래 무방비한 사람을 주먹으로 치면, 그 사람은 맞은 방향으로 밀려 나간다. 하지만 베인은 어디를 어떻게 쳤는지, 청년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고스란히 무릎을 꿇으며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박사는 알지 못했지만 이 타법은 중국 무술의 발경 기법 중 하나로, 타격 뒤 남은 충격량이 상대를 밀어내는 일반적인 공격과는 달리 주먹으로 가한 충격량 대부분을 상대의 몸속에 남겨둠으로써 내장을 진탕시켜 최대한의 피해를 가하는 고급 기술이었다. 갑판 위로 쓰러진 청년을 내려다보는 베인에게, 그레고리가 물었다.
“저기, 대장. 정말로 녀석을 조직에서 내보내실 겁니까? 운전과 잔심부름만 했다 해도, 우리 조직에서 한두 해 일한 게 아니잖습니까.”
“…….”
그레고리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그동안 녀석한테 정 붙은 것도 있지만… 녀석은 너무 아는 게 많아요. 그렇게 똑똑한 녀석은 아니니 오래지 않아 SVR에 잡힐 겁니다. 녀석도 대장과 조직에 대해 입을 여느니 죽는 쪽을 선택하겠지만, 무엇을 말하냐만이 아니라 무엇을 말하지 않냐를 두고도 캘 수 있는 정보란 게 있잖습니까.”
“내가, 그리고 우리가 고작 그 정도 가지고 꼬리를 잡힐 정도로 허술하다고 생각하나?”
“그건 아닙니다.”
“우리가 이제부터 맞서 싸워야 하는 적은 강대하다. 상징적인 의미도 크고. 그런 싸움에, 약한 놈을 데려갈 수는 없어. 무엇보다도….”
베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
“녀석은 아직 돌아갈 곳,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 녀석은… 중요한 순간에 약해져. 우리와는 다르게 말이다. 그런 놈은 쓸모가 없어.”
“…대장 말씀이 맞습니다.”
그레고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시한 일은 해결했겠지?”
“예, 녀석 구좌로 입금해 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차명계좌 몇 개를 거쳐서요. 이 정도면 들킨다 해도 추적 못할 겁니다. 저 정도 부상이면….” 그레고리는 쓰러진 청년을 흘깃 쳐다봤다.
“SVR 놈들도 금방 의심을 접겠죠.”
“그럼 됐다, 동지들이 기다린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킴이 기절한 청년의 어깨를 매고 선실에 던져둔 뒤 다시 나와서는 어렴풋하게 밝아오는 사위 너머 다가오는 배를 향해 신호용 플래쉬를 켜서는 일정 간격으로 깜박이며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박사를 향해, 베인은 시선을 돌렸다.
“목표는 러시아 정부만이 아니야. 우리는, 이 세상의 구조를 뒤엎어 놓을 것이다.”
“!”
“러시아도, 중국도, 유럽도, 미국도… 이 세상 대부분은 하나의 환상에 지배받고 있지. 열심히 노력해서 성실하게 일하면 부와 지위를 획득할 수 있고, 인간의 욕망은 원래 무한한 것이며, 그렇게 쌓아올린 부와 지위를 통해 그 욕망을 쫓아갈 수 있다는 환상. 하지만 박사,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그것이 거짓이라는 걸.”
파벨 박사는 침묵했다. 그의 사고방식은 아직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공산주의적 관념에 훨씬 익숙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상일 뿐, 냉전이 끝나기도 전부터 이미 공산당의 고급 간부들은 ‘자본주의의 추잡한 산물’인 모피 코트와 캐비어와 최고급 위스키와 신형 스포츠카를 즐겼고 그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대참사가 일어났을 때 그의 고향을 외면했다. 공산주의의 이상이 이상일 뿐이라는 것은 그도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탐욕을 긍정하고 오직 그의 충족만을 위해 돌아가는, 일해서 돈을 벌 의무와 그 돈을 쓸 권리 외엔 그 무엇도 약속하지 않는 자본주의의 천박함 역시 도저히 곱게 보이지 않았다. 박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베인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미국의 고담 시… 그러한 현재의 세상을 지배하는 환상의 결집체나 다름없는 곳이지. 부자들은 그 환상을 독점하고, 가난한 자들도 그 환상을 갈망하며 서로 반목하고. 우리의 목표는 거기다. 대법원을 폭파하고, 증권 거래소를 묻어 버리고, 대형 마트에 불을 지를 것이다.”
베인은 박사의 목덜미를 움켜쥐고는 강렬한 푸른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동자가 알 수 없는, 섬뜩하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열정과 광기로 번들거렸다.
“우리가 정의라는 얄팍한 위선은 떨지 않겠다, 박사. 하지만 이것만은 약속하지. 우리는 어떠한 역동성도 창조성도 없이, 어떤 종류의 새로운 지평도 없이 타성에 젖어 매일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변혁을 가져다 줄 것이다. 자극을 줄 것이다. 고담은 변화의 바람을 맞이할 것이다. 그 바람이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린 후에는,”
그 때, 베인의 등 너머 수평선에서 아침 해가 떠올랐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니, 이전 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니라.’ 요한 계시록 24장 4절.”
베인은 일출의 빛을 후광처럼 등지고서 선언했다. 그 후광과 어우러져, 베인의 강대한 거구는 마치 검은 태양을 연상케 했다.
“나를 따라와라. 레오니드 파벨 박사.”
박사의 직감이 경고했다. 이 자는 결코 선인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 힘, 그 눈빛, 그 목소리, 그 압도적인 존재감은 형언할 수 없이 거대한 격류가 되어 박사를 휩쓸었다.
“당신에게, 고담의 미래를 보여주겠다.”
그 검은 태양의 광휘가, 박사의 영혼에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