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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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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미친듯이 비가 퍼붓고 있는 참이었다. 그치지 않을 듯이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촛불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숱한 전경들만이 빼곡이 들어 차서는 주변 도로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너무... 늦었던 모양이다.

주변을 한참 걸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도로 위 가로로 세워져 있는 닭장차들, 무리지어 앉아 있거나 방패를 든 채 어디론가 달려가는 전경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해 한없이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교보 문고 앞에서 담배를 피워 문 채 한참을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쯤 어디선가 모여 있을까. 이렇게 비가 쏟아지니 다들 흩어져 돌아갔을까. 오늘은 몇 명이나 왔을까. 나도 그냥 돌아가 버릴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애초부터 배후나 구심점이 없이 시작한 것이었고, 이제는 모일 곳마저 잃어버린 지금 이게 얼마나 갈까.

이 모든 것이 무익하고 허무한 일이었다고 생각해야 할 때가 가까워진 게 아닐까.

그렇게 한참 생각하던 나는 가방에서 비옷을 꺼내 입고, 가져간 초에 불을 붙이고는 비오는 거리로 나섰다. 한손엔 우산, 한손엔 초를 든 채... 홀로, 이순신 장군상 앞 횡단보도를 몇 번이고 왕복했다.

내 주변으로 사람들이 무심히, 풍경처럼 지나쳐 갔다. 주변에 서 있던 전경들이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보다 서너 살 정도 더 어릴 그들은,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손에 촛불만 들었을 뿐 완벽한 준법 평화시위이니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주목받고 싶어하는 누군가의 돌출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했을까. 혼자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으니 내버려 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까.

우산과 비옷 틈으로 뚫고 들어오는 빗줄기에 바지를 흠뻑 적셔가며 신호등에 파란 불이 들어올 때마다 횡단보도를 왕복한다. 이 얼마나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한심한 행위인가.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아마도, 위안을 구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기 싫다'는 알량한 자기만족을 위한 정신적 마스터베이션.
 
몇몇 사람들이 내게 '본대가 어디있냐'고 물었지만, 난 모른다고 답했다. 그 사람들의 표정에서 '대체 왜 혼자서 저러고 있나'하는 의문을 읽었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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