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기반으로 한 재창작이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놀란 감독의 영화를 인상 깊게 보았고, 그 강한 인상만큼이나 불만도 적지 않았던 나의 개인적인 팬심에 의해 쓰여진 것이며 영화의 공식 설정은 물론 배트맨 원작 코믹스와의 설정들과도 충돌하는 부분이 다수 있다. 또한, 나만의 재해석이나 오리지널 설정도 포함되어 있다. '나만의 다크나이트 라이즈'라는 의미에서 제목을 바꿀까 생각도 해봤는데('다크 나이트 어센션'이나, '고담 나이트' 등의 제목을 생각해 봤다)... 영화와는 이래저래 바뀐 부분이 많긴 하지만, '영웅의 좌절과 재기'라는 면에 있어서는 영화의 줄기를 따르고 있기에 그냥 라이즈로 결정 땅땅.
0.
2012. 7. 19. 우크라이나 변방의 한 핵물리학 연구소
“581초, 582초, 583초, 584초… 제 1중수로부터 제 9중수로, 모두 안정적입니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여성 연구원, 소피아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성공이군요. 우리가… 해냈어요, 인류 최초로.”
옆에서 지켜보던 뚱뚱한 중년의 다른 연구원이 미소지었다. 그의 주름진 눈가에 살짝 물기가 배어나와 있었다. 그는 충혈된 눈을 비비며 고개를 돌렸다.
“축하드립니다, 파벨 박사님. 미국 녀석들도 전부 손을 뗀 상온 핵융합 기술이… 우리들 손에서 완성됐어요. 크렘린의 우리 ‘친구들’도 이제 더 이상은 연구비 삭감을 운운하며 간섭하지 못할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감격에 젖어 있었다. 제정 러시아가 붕괴하고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된 이래로 내내 러시아의 영향권 내에 있었으며, 냉전 체제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정치적, 경제적으로 러시아에 종속되어 있다시피 했던 우크라이나 출신의 연구자로서 감격스럽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레오니드 파벨 박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샴페인을 터뜨릴 때는 아닐세. 좀 더 지켜봐야 해.”
뚱뚱한 중년 연구원, 안드레이가 상기된 붉은 얼굴로 불평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가 그간 한 고생이 얼마인데요. 우리가 태양을 창조해낸 거에요. 비록 지금은 작은 연구소 하나 규모지만,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인류는 더 이상 핵분열이 가져오는 오염과 대폭발의 공포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고요!”
파벨 박사는 가볍게 미소지어 보였다. 그의 나이는 이제 40대 초반에 불과했지만,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칼과 미간에 깊이 새겨진 주름이 그를 실제보다 10년은 더 나이들어 보이게 하고 있었다. 파벨 박사는 손을 들어 안드레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알겠네. 실험을 계속하게, 나는… 윗선에 보고를 하고 오지.”
“네, 박사님!”
안드레이는 기분 좋게 대답하고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노심 온도를 계속 확인해라! 시간 재고 있지? 긴급 냉각반은 준비 되어 있나?”
잠시 흥분과 기쁨으로 가볍게 달아올라 있던 관제실 내부의 공기에 다시 긴장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긴장은 이전보다는 확실히 가벼워져 있었다.
상온 핵융합.
현재의 원자로는, 기본적으로 우라늄 또는 플루토늄의 원자핵을 중성자를 통해 연쇄 분열 반응을 일으킴으로써 그 과정에서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원리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연료봉의 재처리 과정에서 방사능이 누출될 위험성이 상존하며, 분열 반응이 통제를 벗어나 폭주할 경우 노심 융용이 발생해 대재앙을 일으킬 수 있다. 핵융합은 이를 반대 방향으로 접근하여, 두 개의 원자핵을 인위적으로 결합시킴으로서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취한다. 기술적으로 훨씬 난이도가 높지만 핵분열보다 안전하고 덜 유해하다는 면에서 수소 융합과 더불어 대표적인 차세대 에너지로 주목받고 있으나 그 기술적 난점으로 인해 실용화는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상온 핵융합은 고온 환경이 아니라 실온에서 핵융합 반응을 유도함으로써 고온 환경을 유지해야 하는 기존의 방식보다 효율성이 월등하지만 1989년 미국 유타 대학에서의 상온 핵융합 실험이 사실 실패했음이 드러나며 각국 정부는 상온 핵융합에 대해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과 일본에서 실험이 재개되었고, 지금 러시아의 그늘에 가려 세계의 주목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중앙 아시아 북부의 작은 나라에서 그것이 성공한 것이다. 태양은 수소가 헬륨으로 핵융합을 일으킴으로서 붙타 오르며, 지구의 온갖 생명을 잉태시켰다. 그 불꽃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수많은 신화와 전설에서 최고신 또는 그에 준하는 신적 존재로 숭배받아 왔다. 그리고, 이들은 열악한 환경과 부족한 예산의 압박 속에서 새로운 태양을 탄생시켰다. 그것은, 신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인간의 위업이기도 했다.
“다들, 그 이야기 알지? 비키니 섬 원폭 실험 직후 오펜하이머가 힌두교 경전을 인용해서 한 말! ‘나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죽음의 신이 되었다.’라고 한 거 말이야! 우리는 신을 낳았어!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미래로 이끌어 갈 신의 힘이 우리 손에서 탄생한 거라고! 오, 그리스도여!”
문 뒤편에서 들려오는, 안드레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파벨 박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좀 성급하고 감정적이긴 하지만 그는 훌륭한 학자였다. 원래대로라면 그는 위대한 과학자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원래대로였다면…. 가슴 한 구석이 죄책감으로 쓰라려오는 것을 느끼며 파벨 박사는 복도 천정에 붙어 있는 CCTV를 흘끗 바라보았다. 카메라는 천천히 회전하며 복도 곳곳을 비추고 있었지만, 그 렌즈에 잡히는 것은 텅 빈 복도일 뿐일 것이다. 파벨 박사는 가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연구소에서 지급하는 업무용 핸드폰이 아니라, 은밀히 손에 넣은 개인용 핸드폰이었다. ‘HYUN-DAI'. 파벨 박사는 꿀꺽 침을 삼켰다. 지금부터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 마음만 먹는다면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헌신한다고 여기고 있는, 유능하고 충직하지만 한없이 순진한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과학 저널의 표지를 장식할 것이다. 역사책에 이름이 기록될 것이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계보를 잇는, 위대한 과학자로서 수많은 이들이 자신을 칭송할 것이다. 상상만 해도 아득해질 것 같은 명예와 환희가 그의 혈관을 타고 돌았다….
현실에서는, 그렇게 될 리 없어.
파벨 박사는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은 감정을 억눌렀다. 이 연구소는 우크라이나의 국영 연구소였지만, 자본과 기초 기술을 지원한 것은 어디까지나 러시아다. 러시아 본국이 아니라 외진 우크라이나에 세운 것도 실험이 실패할 경우의 위험 부담을 회피하기 위한 것일 뿐. 다행히 성공하긴 했지만, 실패했다면 그의 조국은 다시 한 번 대재앙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주목 받는 천재 물리학도로서 모스크바 대학에 재학 중이던 그가 방학을 맞아 그의 고향인 우크라이나 프리피야트로 돌아왔을 때, 그 무렵 갓 서기장에 취임하고서 그곳을 방문한 미하일 고르바쵸프는 말했었다. 러시아는 같은 소비에트 연방에 속한 형제국인 우크라이나를 기억할 것이라고. 당시 젊었던 그는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냉전이 끝나가는 국제 정세 가운데서,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조국이 위대한 연방의 한 축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그로서 서방 세계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념을 초월해서 인류가 상호 이해와 번영의 미래로 나아가는데 기여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거대한 빛이 천지를 메웠고,
거대한 암흑이 그 청년의 마음을 채웠다.
고르바쵸프와 소련 정부는 거짓말을 했다. 인접한 핀란드와 덴마크에서 이상을 감지하고서 해명을 요구한 끝에, 사고 후 이틀이 지나서야 관영 언론사를 통해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 공표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군사위성을 통해 진실이 알려진 이후에야 비로소 소련 정부는 사고 발생을 인정했다. 그 사고는 20세기 최악의 재앙으로 역사에 남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파벨은 기억했다. 발전소 직원이었던 그의 부모님,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여동생, 어린 시절의 그를 ‘파브’라고 부르며 자주 놀아주었던 발레리 아저씨, 집으로 돌아가면 늘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꼬리를 흔들며 반겨 주었던 바쿠닌. 그러나 소련 정부는 그 모든 이름들을 단지 숫자로만 취급했다.
파벨 박사는 복도 벽에 기대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고통스런 슬픔의 기억을 억누르려고 노력했다. 다른 생각을 해야 했다. 보다 더 이성적인 생각을 해야 했다. 하지만 어떤 생각을 해야 하지? 카페인과 암페타민으로 억눌러온 피로가 해일처럼 일어나 그를 후려쳤다. 그 해일의 한 자락 가운데 떠내려가는 작은 판자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심정으로 파벨 박사는 마음을 정리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이 실험은 성공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영세한 작은 나라에 불과하고, 러시아는 늘 그래왔듯이 그 성과 대부분을 착복해갈 것이다. 영향력 있는 국제 과학 저널에 그와 그의 팀원들은 한 줄짜리 ‘조력자 명단’에나 간신히 이름을 올릴 테고, 원래대로는 모든 인간들을 위해 쓰여야만 할 신의 힘은 철저하게 인간적인 정치 논리와 막후 싸움의 카드로 전락할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파벨 박사는 핸드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이것은 비이성적인 행동이다. 오랜만에 치밀어 오른 슬픔과 고통, 분노 가운데서도 그의 냉철한 정신이 그에게 속삭였다. 그는 인간이었고, 인간의 세계 가운데 속해 있었다. 그리고 유능한 천재 핵물리학자지만 단지 그 뿐인 그에게 있어, 끝이 보이지 않는 그물과 같은 운명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다. ‘그들’이 과연 그 그물 가운데서 나를 건져내줄 것인가? 무리일 것이다. 지금 하려는 일을 저질러 버리는 대신, 재단과 경비 사무소에 연락하고, 모든 것을 고백하면…. 그러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영혼 가운데 새겨진 원한과 슬픔은 결코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 날의 기억을 떨쳐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함께 일과 웃음을 나눠온 동료들은 무사할 테고, 계속 연구를 하며 조국을 위해 무언가 더 나은 길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맞는 길일 것이다.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일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던 대로 사는 것만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운명일 것이다. 그 운명에 따라 체념한 채, 이 핸드폰을 부숴서 폐기해 버리고, 나는….
파벨 박사는 핸드폰의 단축 번호로 지정된 1번을 길게 누른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첫 신호음이 미처 끊기기도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결정했나 보군.
파벨 박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좋소, 하지만 조건이 있소. 내 동료들에게는 손대지 마시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은 노심의 코어와 팔라듐 동기화 과정을 정리한 수식뿐이지 않소?”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았다. 능숙하지만 약간 독특한 뉘앙스의 러시아 어. 어떤 역경 앞에서도 결코 굴할 것 같지 않은- 이미 수많은 고통과 절망을 직면하고 그 모든 것을 결국 넘어선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절대적인 냉정함.
-어려운 요구를 하는군. 반항한다면 죽일 수밖에 없어.
“그들은 반항하지 않을 거요. 어, 그들은 평범한 연구원일 뿐이요. 평생 폭력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 온….”
-사람은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법이지.
음성 너머에서, 파이프 너머로 호흡하는 듯한 후욱 후욱 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대학 시절 암시장에서 어렵게 구해서 친구들과 몰래 돌려 본, <스타 워즈>의 악역 다스베이더를 연상케 했다. 그때는 얼굴에 검은 안경과 검게 칠한 마스크를 쓰고 기숙사 복도를 닦는데 쓰는 대걸레 봉을 든 채 서툰 영어로 “I'm your father!"라고 외치면서 친구들과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지금의 그 목소리는 파벨 박사의 피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 목소리에 희미한 비웃음이 감도는 것을 느끼며 파벨 박사는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고 보면 알겠지, 박사. 아무튼, 이쪽은 준비됐다.
“버, 벌써? 알았소. 아, 실험은 성공적이오. 아직 약간 불안 요소가 있긴 한데….”
-축하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곧 받으러 가지. 지금 곧 말이야.
목소리는 말을 잘랐다. 파벨 박사는 순간 당황했다. 설마 이쪽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건가? 혹시 나 이외에 내통자가? 그러나 파벨 박사는 냉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머리 위에 켜진 방폭등이 요란하게 깜박거렸다.
“언제 올 거요? 나도 나름 준비가 필요해. 서류도 몇 개 위조해야 하고, 그리고 또….”
-그럴 필요 없어. 지금 거기서 물러나게, 박사.
“뭐라고…?”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달렸다.
-한 번만 더 말하지. 지금, 곧 받으러 가겠다. 그러니 그곳에서 물러나.
전화가 끊겼다. 파벨 박사는 불길한 예감이 전신으로 치솟는 것을 느끼며 복도의 흰 벽을 노려보았다. 설마? 아니, 아니겠지? 하지만 진짜라면?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과 더불어, 기분 나쁜 이명이 그의 귓속을 가득 채웠다. 위잉, 위이이잉, 위이이이잉. 식은땀이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막을 잡아 당기는 듯한 고통과 함께, 그 이명이 하나의 목소리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방폭등이 뚝, 하고 꺼졌다.
도망쳐.
파벨 박사는 스스로도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과 함께 복도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다음 순간 굉음과 함께 벽이 무너져 내리고, M2A2 브래들리 장갑차의 육중한 거체가 실내로 뛰어 들었다. 방금까지 파벨 박사가 서 있던 곳에 벽돌과 철근이 박힌 시멘트 파편들이 날아들었고, 요란스럽게 비상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거대한 야수가 포효하는 듯한 엔진음과 더불어 장갑차의 상부 해치가 열리고,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했다.
2미터 가까운 장신에, 위압적인 근육으로 뒤덮여 있는 거구. 확실히 큰 체격이긴 하지만 어쨌든 ‘인간’의 범주 내다. 하지만 그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형형한 존재감은 실로 ;거대하다;는 느낌을 주기 충분했다. 말끔하게 민 머리와, 강렬하게 번뜩이는 한 쌍의 푸른 눈동자. 코와 턱 주변을 덮고 있는- 해골의 턱을 연상케 하는 검은 마스크. 웃통은 벗어젖혀서, 터질 듯한 근육과 그 위에 새겨진 다양한 문신들이 어지럽게 춤을 췄다. 뱀, 해골, 별, 그리고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
그 눈길이 복도 한 구석에 구겨져서 콜록대는 파벨 박사를 향했다. 전화 너머에서 몇 번이나 들은 적 있는, 주변을 울리는 듯한 낮은 음성.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로군, 박사.”
스프링쿨러가 작동해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파벨 박사는 떨어뜨린 안경을 주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무너져 내린 벽 너머 바깥에서 요란스러운 사격음과 헬기의 로터음, 그에 섞여 욕설소리와 비명소리들이 들려왔다. 여기저기서 폭발이 일어나고, 전투 헬기가 요란스레 맴을 돌고 있었다. 기분 좋게 그 소음에 귀를 기울이던 ‘그’가 파벨 박사를 돌아보았다.
“타라. 길게 이야기할 틈이 없으니.”
그 명백한 명령조의 말투. 어떤 종류의 불복도 반항도 용납하기는커녕, 애초부터 전혀 고려조차도 하지 않는 듯한 완벽하게 순수한 명령에 파벨 박사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몸 여기저기가 쑤셨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스프링쿨러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그의 마스크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불길이 솟구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