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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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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연의 웹툰, <도자기>를 읽고서 감탄했다. 고고미술사학도로서 자신이 공부하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나, 지식 때문이 아니다. 그 정도의 열정이나 지식은 흔하다. 하지만 도자기라는 소재에 애정이 깃든 시선 한 꺼풀을 덧씌워, 그런 종류의 따뜻한 감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대단히 희귀하고 특별한 재능이다. 개인적으로 호연이라는 작가에 대해서 잘 알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인으로서의 호연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따뜻함과는 달리 의외로 냉담하거나 편협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예술가의 개인적인 인성과 그가 창조해낸 작품의 아름다움 간에 엄청난 괴리가 있는 경우는 숱하게 많다. 북구 신화를 소재로 장중하고 찬란한 선율을 빚어낸 리하르트 바그너는 라이벌 음악가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반 유대주의의 선봉에 설 정도로 공격적이고 독선적인 성격으로 악명 높았고, 한국 시단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서정주는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다가 해방 이후 그 행적에 대해 반민특위에서 추궁당하자 '그렇게 쉽게 일본이 무너지리라고는 생각 못했다'는 옹색한 변명이나 늘어놨고 그 뒤에는 전두환을 찬앙했다. 어쩌면 호연 역시 그럴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가의 인성과 그 창조물은 별개이며, 자극적인 설정이나 요란한 연출 없이 이 정도의 작품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호연은 주목할 만한 웹툰 작가다.

....라고 생각했었다.

예전에 심장병 때문에 연재를 중단하고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1만원 씩에 파는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어서... 요즘 근황이 궁금해서 이글루를 뒤져봤더니 나온 게, 호연 환빠 의혹 파문이었다(...) 호감이 급감하는 걸 느끼면서 최근 연재작인 <단군할배요!>를 찾아 1화부터 정주행했다. 일단 현재 연재분까지 본 바로는... 이글루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내 최애 작가가 환빠라니 이게 무슨 소리요 의사양반' '호감이던 작가인데 실망했음'라는 식의 반응은 약간 지나친 감이 있어 보인다. 환빠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오오 위대한 환국 오오 킹왕짱 우리 겨레' '세계의 모든 고대 문명의 기원은 한민족이다'라는 식의 터무니 없는 신념 때문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쵝오'라는 신화는 세계 어딜가나 있다. 환빠가 문제가 되는 건 신화와 역사를 혼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재자들이 좋아하는 '민족주의+국가주의'의 결합이 어떤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지에 대해 거의 전혀 성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월드나 한민족 역사공원 홍보는 물론 상당히 거북하지만(단월드는 비리 문제도 있고), 호연의 '환빠 의혹'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개인의 신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 수준으로 보인다. 단월드 비리 때문에 '으헝헝 나으 호연님이 그런데 빠지면 앙대'라고 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이해는 되지만... 뭐 한 두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성인인 이상 그런 건 스스로가 판단해야 할 문제다.

개인적으로는 나보다 훨씬 훌륭한 미덕을 가진 사람이 한나라당을 지지하거나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걸 볼 때마다 느끼는 씁쓸함이 오랜만에 들었다.

2)
오랜만에 최규석의 <습지 생태 보고서>를 다시 꺼내 읽었다. <도자기>를 읽은 시기와 우연히 겹치긴 했는데... 역시 난 이쪽이 더 취향인 듯 하다.

"그곳에는 닮고 싶지 않지만 언젠가 닮아 버릴지도 모를 모습들과, 전혀 재밌지 않은 농담과, 연민인지 경멸인지 모를 감정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타인의 슬픔을 피해 달아나는 빠른 발걸음이 있다."
"그 애는 말할 사람이 필요했던 거야. 근데 난 제대로 위로 한 마디 못해줬어. 친해질까 봐... 그 슬픔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전해질까 봐 무서웠어. 나도 내 꿈만 바라보며 달리기에도 벅찬데 왜 다들 나에게만 나타나는 걸까? 며칠 전엔 금방 잘린 듯한 손목을 든 동남아 노동자가 그 많은 사람들을 두고 내게로 달려 왔었거든. 지금 와 봤자 난 아무 것도 못해주는데 왜 하필 나한테..."
"대화는 끝났다. 이런 경우 고민의 당사자는 죄인이 되고 가장 비참한 경험의 소유자가 유일한 발언권자가 된다. 제 감정을 못 이겨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는 친구를 보며 '밥에다 간장' 운운한 자신이 부끄러워져 버렸다."
"우리에겐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 그것이 싫은 논리적인 이유를 백 가지는 더 댈 수 있는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도망이 아닌 선택일수는 없는 걸까? 패배할 것이 두려워서 출발선에 서기를 피하고 있는 걸까? 혹은 어른이 되는 날을 자꾸만 미루고 있는 것일까? 불안한 눈빛으로 친구의 연봉을 묻거나 부동산 정보를 뒤적거릴 어쩌면 슬플 그 날에 한 때는 이렇게 되지 않으려 노력했노라 자위할 기억을 만들고 있는 것 뿐일까? 세상 안으로 성큼 들어서지도 발을 빼지도 못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지금 그래도 조금씩은 자라고 있는 것일까?"

결과적으로 봤을 때 최규석은 재능도 열정도 있었지만 당장 눈 앞의 생활고 앞에서 번민하다가 결국 펜을 꺾은, 수많은 동료와 후배 만화가에 비하면 '성공'한 편이다. 썩 여유 있는 삶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의 이름은 제법 알려져 있고, 소수지만 충실도 높은 팬들도 있고, 작년에는 명동 성당에서 결혼식도 올렸다. 최규석 역시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훌륭한 인간'은 되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 역시도 '좀 배운 좌파' 특유의 치기나 겉멋, 비겁함, 모순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우러나오는 페이소스는 너무나도 절실한 것이다. 진정성이라는 말은 쓰지 않겠다. 요즘은 이건희 복귀사조차도 진정성이 느껴진다느니 하는 시대다. 하지만 그 절실함은 그 정도로 싸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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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 펌이라고 되어 있길래... 늦은 시간에 그의 홈페이지에서 퍼온 작품. 스스로 줄을 자른 연은 하늘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3)
차기 대선 후보 지지율 1위는 굳건하게 박근혜고, 2위는 유시민이다. 박근혜가 박정희의 유산에 기대고 있는 한 그녀는 독재자의 딸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고, 나 역시 박근혜를 찍을 일은 없겠지만 유시민도 썩 석연치 않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역대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였지만 보수 정치인으로서의 한계는 뚜렷했고, 유시민은 그 정치적 적자다('노무현은 좌빨이었다'고 우기는 뉴데일리 따위는 상종할 가치도 없다). 그리고 좌파로서의 내 정치적 정체성에 의거해 봤을 때 유시민은 박근혜보다 훨씬 더 '위험한' 대통령이 될 지도 모른다.

이명박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그는 다만 '성장'과 '부흥'의 신화에 매몰된, 한국의 '근대의 그늘'을 외면한 자들의 욕망과 두려움이 실용의 이름을 빌려서 빚어낸 괴물일 뿐이다. 박근혜는 적어도 박정희만큼 무자비하지는 않을테고 현실적으로 그렇게 노골적으로 무자비할 수도 없겠지만 그 태생적 한계는 너무도 명백하고, 아버지의 후광과 그 가신들의 세도를 통제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시민은?   

지난 대선에서 나는 정동영의 비열함과 이명박의 사악함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투표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 놈이 그 놈'이라고 하는 놈은 보통 더 나쁜 놈 편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진보 후보에게 표를 주는 대신 나름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여겨졌던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틀린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표가 갈리는 바람에 박근혜가 당선된다 해도, 이번에는 내 신념이 이끄는 대로 선택할 것이다. 그 신념이, 나르시즘에 불과한 것이라 해도.

신념도 신념이지만.... 다음 대선에서 유시민을 찍는다면, 당선 여부와는 별개로... 그 자체로 나 역시 결국 '실용'의 악마에게 굴복했다는 의미가 되어 버릴 것이다.

나는 강자다.

4)
현재 리비아 민중운동 현황 정리 간략하게.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진압 중. 추정 사망자 수는 아직 불확실. 폭격기를 동원했다는 말도 있음.
*법무장관 사임. 주 아랍연맹 대사가 사퇴. 군인들 일부는 시위대에 참가. 공군기 2대는 몰타에 망명 신청.
*카다피는 '항전' 결의. 헐퀴.
*전기와 전화 차단. 외신에 새는 걸 막기 위해 정부는 용병들을 고용해서 진압에 활용.
*시위대에 발포 명령을 거부한 군인들 화형 당함.
*카다피가 자신이 있다고 밝혔던 트리폴리 시는 시민들에게 점령.
*CNN 기자들이 이집트를 통해 리비아로 들어갔는데 국경 수비소가 비어 있음.
*내무장관 사임. '혁명 참가' 선언. 군에 시위에 동참 호소.
반미 운동에 대해 한참 관심을 갖고 있던 고등학교 무렵에는 '저 오만한 제국에 대항한다'는 것만으로도 카다피를 높이 샀었다. 미국의 오만한 패권주의에 대한 거부감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반미'라는 기치를 들고 있다 해서 일단 호감을 갖지 않게 된지는 오래 되었다. 한 편으로는 일찍 개념 잡아서 다행이다 싶기도 한데... ....그러면 뭐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은데, 젠장. 리비아는 카다피 집권 전까지 제대로 된 근대 국가의 꼴을 갖추지 못했고, 대부족들의 연합체에 가까운 성격이었다. 카다피가 축출된다 해도 '민중의 승리' 같은 상쾌한 결말은 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건 덤. 중동 국가별 반정부 시위 특징 및 양상. 출처는 경향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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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의 인도네시아 대사관 잠입 실패 국격 상ㅋ승ㅋ 건도 그렇고... 개강을 앞두고 쓰던 소설 완성에나 매진하려고 했는데 뭔 놈의 사건이 이렇게 연이어 터지는지, 쯧.

5)
오늘 학교로 돌아간다. 1년 만이다. 이제 그나마 친하던 동기들은 남아 있지 않을테고, 내가 서툴게 사랑했던 '문예창작학과'는 그 자리에 없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과가 어떻게 돌아가건 말건 신경쓰지 않은 채, 학회비 납부나 학과 행사에 대한 수동적인 참가 등 최소한의 의무만을 기계적으로 행하게 될 것이다.

...우울한 1년이 되겠지만, 견딜 수는 있겠지. 이젠 지겹다. 나도 내 할 일에만 신경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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