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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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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판이 나온 이후 많은 사람이 열광했고, 지금도 주변을 보면 좋아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물론 4판은 3.5판까지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고레벨로 갈수록 캐스터 만만세가 되고 전사류는 바닥만 긁어야 한다거나, 바드와 몽크는 너무 쓸모가 없다거나(...), 기타 등등.

4판은 꽤나 달랐다. 모든 클래스에게 저마다 뚜렷한 역할이 부여되고, 모든 레벨 대에서 그 각각의 역할의 중요성은 거의 균등하게 유지된다. 파이터나 팰러딘이 적을 마킹하여 잡아두며 맷집을 대주고(탱커), 로그나 워록이 화력을 쏟아내고(스트라이커), 클레릭과 워로드가 사령탑이 되고(리더), 위저드가 전황 전반을 조율하고(컨트롤러). 4판의 전투는 마치 체스와 같은 전술성이 대단히 강조되며, 3.5판 때처럼 이런저런 멀티 클래스와 피트 조합으로 혼자서 짱먹는 캐릭터를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렇다. 4판은 전체적으로 대단히 MMORPG스럽게 변했다(아마도 이건 원소스 멀티 유즈를 노리는 돈법사의 전략과도 맞물려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드는 쪽이 온라인 게임화에도 더 편할테고).

그러나, 난 이러한 기조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4판은 캐릭터의 컨셉이나 특징을 살릴 방법이 오로지 전투 뿐이다. 물론 D&D의 본질은 '던젼을 뒤지고, 괴물들을 때려잡고, 보물을 털어서 살아 나오는 것'이지, '그 세계를 살아가는 한 인물의 여정'을 묘사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D&D는 대체로 캐릭터에게 고유한 개성을 심어주기가 힘든 시스템이고, 그래서 난 캐릭터의 면면을 뚜렷이 만들어주고 유니크함을 부여한다는 면에 있어서 프리스티지 클래스라는 개념을 무척 좋아했다-내가 만드는 게 더 강하다라는 디자이너들 간의 경쟁 심리나 선결 조건의 단순한 획일성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로 인해 파워 레벨의 폭주라는 3.5의 대표적인 폐해 중 하나에 기여했다는 건 사실이지만-.

4판은... 게이밍적인 밸런스나 전투의 전술성에 있어서는 크게 발전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럼 차라리 MMORPG를 하지 왜 굳이 번거롭고 불편한 준비 과정을 거쳐가며 RPG를 하느냐'라는 의문을 떨치기가 힘들다.

사진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 화가들은 이제 우린 모두 붓을 꺾어야 한다고 탄식했다. 대상을 얼마나 세밀하게 재현하느냐가 그 때까지 화단의 패러다임이었기에. 그러나 회화는 대상에 대한 화가의 고유한 시각과 해석을 더욱 중시하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을 바꾸며 현대 미술을 낳고 살아 남았다.

그리고 4판 룰북을 들여다 보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패러다임의 혁신을 꾀하는 대신 어떻게든 사진의 재현성을 따라 잡으려고 하면서 '우리 그림은 기계가 한 순간에 대량으로 찍어내는 사진과 다르다. 우리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 정성스레 대상을 모사하고, 그 장인정신을 알아주는 가치 있는 고객들을 상대로 장사한다'고 주장하는 화가를 보는 느낌이다.

돈법사가 4판의 제작을 발표하고 새로운 에디션이 어떤 경향성을 가질 지가 웹에 돌기 시작할 무렵, 패스파인더 RPG는 독립적으로 3.5의 계승을 주창했다. 그러나 공개된 패스파인더 RPG의 베타 버젼은 3.5의 문제점들을 새로운 방향에서 접근하지 못한, 이도저도 아닌 결과물에 가깝다는 혹평이 많다.

뭐랄까... 빌드에는 큰 가치를 두지 않은 채, 시나리오에 플레이어가 작가적인 차원에서 개입하며 서사를 만들어 나가는, 나와 같은 방식으로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도 찾아보면 있겠고, 그런 사람들과는 여전히 즐겁게 게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굳이 나와 같은 방식이 아니라 해도 그럭저럭 즐기지 못하라는 법은 없을 테고. 그러나 내게 있어, 더 이상 RPG로서의 D&D는 '열광할 만한 가치'를 갖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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