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브 바커의 <미드 나이트 미트 트레인>과 스티븐 킹의 <애완동물 공동묘지>에서 나타난 공포의 키워드를 분석해서 미국인이 갖고 있는 '두려움'의 두 원형을 추출해 내고, 그것이 한국인 입장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비교 분석한 글. 2회 파운틴 리뷰 공모전에 내서 최우수상에 뽑혔다. ...그것까진 좋았는데, 뽑혀서 실리자마자 파운틴이 폐간되어 버렸다. 안습. 시부엉 내가 투고하는 데는 어째 코너가 폐지되거나 잡지 자체가 폐간되거나 왜 죄다 이 모양인가 몰라ㅇ<-<
1. 개관
미국에서 만들어진 호러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을 보다보면 미국인들은 ‘지금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 땅’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심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을 때가 있다. 클라이브 바커의 단편 「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에서는 폐쇄된 지하철 역 깊숙한 곳에 숨어서는 정기적으로 살인마 ‘마호가니’가 죽인 자들의 인육을 섭취함으로써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이 나라의 아버지들'이 등장한다. 스티븐 킹의 장편 『애완동물 공동묘지』에서는 원주민들이 경외하던, 죽은 자를 묻으면 얼마 뒤 부활하는-그러나 무언가 중요한 '알맹이'가 바뀌어 버린 채로- 신비한 땅이 등장한다.
호러 장르의 거장,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감정은 공포이며 가장 강력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이다.”라는 언명을 남겼다. 똑같은 '두려움'의 감정이라고 해도, 잔인무도한 연쇄살인마가 자신을 묶어놓고서 칼날을 핥으며 웃어 보일 때 느끼는 감정과 모든 불이 꺼진 심야의 학교에서 홀로 복도를 거닐다가, 분명 잠겨 있을 교실 문이 열리고 무언가가 복도로 나와 자신을 쫓아올 때 느끼는 감정은 그 성격이 다르다. 대상의 정체를 알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공포의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며 서사 내부적으로 주인공이 어떠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위에서 제시한 두 작품의 경우 공통적으로 '미국인들이 도착하기 전, 이 땅에서 살았던 자들과 그들이 품은 비밀과 전설'에 대한 무지와 공포심을 그 기저에 깔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접근방식이 저마다 약간씩 다르며, 그에 대해 미국인이 느끼는 두 종류의 공포감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지점에서 가질 수 있는 의문점은, 미국인이 느끼는 이러한 공포감이 한국인 입장에서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클라이브 바커는 미국 내에서도 작품 세계가 다소 매니악하다는 평을 듣는데다가 한국에서의 인지도라고는 기껏해야 영화 『헬레이저』 시리즈의 제작자라는 것 정도에 불과하다. 스티븐 킹은 한국에서도 제법 폭넓은 팬 층을 거느리고 있으며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유명 작가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철저하게 미국인 특유의 감성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두 작가가 저마다의 작품 속에서 묘사하고 있는 ‘미국인의 공포’를 찬찬히 들여다 보면 그것은 한국인의 공포와도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어지는 글을 통해 어떤 면에서 양자가 연관을 맺는지 분석해 보고자 한다.
2. 작품 분석
1)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
클라이브 바커의 이 단편은, 뉴욕에 거주하는 회사원인 레온 카우프만의 심경 묘사로 시작한다. 카우프만은 뉴욕을 한 때 ‘기쁨의 도시’라고 부르며 동경했지만 막상 뉴욕에서의 삶은 그가 막연히 상상한 것과는 달리, 매일 같이 이어지는 끔찍한 살인사건들과 그러한 사건을 먹음직한 고기요리처럼 입에 올리는 사람들 투성이다. 깔끔하게 차려 입고, 점잖게 말하고, 품위 있게 행동하는- 카우프만을 둘러싼, 얼핏 보기에는 교양 있고 세련된 도시인으로만 보이는 이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이 ‘굶주림’이라는 키워드는 바커의 소설 전반에 공통적으로 깔려 있는 키워드이긴 하다. 식욕은 성욕과도 닮아 있으며, 그러한 욕망은 인간과 괴물에게 공히 나타난다. 그리고 그 욕망이 결코 완전히 채워지지 못하기에 괴물 역시도 고통 받는 불행한 존재라는 관점이 바커의 많은 작품들 기저에 깔려 있지만 유독 이 작품에서 그것은 유달리 부각된다. 기타무라 류헤이가 감독한 이 작품의 영화판에서 특히 집요하게 묘사되는 이 굶주림은 궁극적으로 도시적인 삶-특히 미국식 소비 자본주의의 병폐로 가득한 대도시-의 근본적인 모순을 반영하고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난 엄숙한 청교도들과 법망을 피해서 식민지로 향한 무뢰한들이라는 일견 어울리지 않는 두 무리에 의해서, 그 곳에 오래전부터 터전을 잡고 살아가던 원주민들에 대한 온갖 협잡과 배반, 학살을 거쳐 세워졌다. 물론 원주민들도 풍족한 환경과 넓은 사냥터를 확보하기 위해 서로 대립해왔고, 스페인이나 프랑스 등 유럽 열강들이 그 땅에 식민지를 세운 이래 대리전을 치르기도 했다. 그들이라고 해서 뉴에이지 계통 서적 등에서 흔히 묘사되곤 하는 ‘고귀한 야만인’들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식의 인식은 오히려 어렵게나마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는 원주민들의 삶을 과거의 낭만적 잔해로 박제화하는,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근대적인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지만 않았을 뿐 엄연히 이 대륙의 정당한 주인이던 원주민들의 피 위에서 미국은 건국되었고,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유럽이 역사의 전면에서 퇴장함과 더불어 성립된 냉전 구도 하에서 서방 진영의 맹주가 되었다. 독립 전쟁 이후로 200년이 좀 넘는 기간 동안 이러한 체제의 격변과 급격한 양적 발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떠받쳐지는 미국식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과잉’을 불러왔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그러한 지나친 물질적 풍요로움과, 매카시즘으로 대표되는 경직된 반공주의에 앞뒤로 둘러싸여서 무의식적으로 정신적, 초월적 가치에 대한 허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히피 문화의 성립,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 운동 등은 이러한 미국인들의 허기를 반영한다.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정신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의 부재는 겉모양새만 그럴싸한 ‘동양적 정신’에 대한 판타지와 오리엔탈리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고 한때 미국 사회의 문화적 색채를 선도했던 명상이나 동양 철학 등은 한때의 유행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냉전이 종식되며 맞서 싸워야 할 적도, 물질문명의 공허를 채워 주리라 생각한 정신문화도 잃어버린 미국은 막대한 재화들에 둘러싸여서 더욱 심각한 기갈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본질은, 모든 종류의 재화에 저마다 수량화된 일정한 가격를 매기고 그 가격에 대한 사적인 지불능력(즉, 재화를 사유화하는 능력)을 통해 사회적 계급이 나뉜다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개인의 자아를 실현하는 수단으로서의 노동을 신성시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인간이 스스로의 본원적 자아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 지불능력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 즉 생활의 방편으로서만 노동을 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거쳐 얻은 지불능력으로 사유화시킨 재화를 통해서만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수 있게 되고 결국 주체로서의 인간은 존엄성을 잃게 되리라고 여겼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안티테제로서 공산주의를 주창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자본주의는 인류가 최종적으로 이룩할 경제 체제인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중간과정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물론 그는 자본가 계급이 스스로의 직접적인 노동 없이 경영과 금융을 통해 부를 축적하며 노동 계급을 착취한다고 규정하고 그에 대항하는 혁명을 촉구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자본가 계급이 스스로의 이익을 지키고자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필연적’ 이행을 가로막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공산주의와 반대되는 적대적 대상으로(즉, 서로 짝패를 이루는 대등한 사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의 사후 제정 러시아가 붕괴하고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임시정부가 들어섰으나 10월 혁명을 통해 엘리트 혁명가들이 인민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과격파인 레닌의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았고, 이는 공포와 억압을 작동 기제로 하는 스탈린주의로 전화되었다. 스탈린주의는 국가로 대표되는 외부적 권위를 거부하고 개인 간의 이해와 상호부조를 통해 사회주의적 이상향을 건설하고자 한 아나키즘 등을 비롯한 공산주의 내부의 다른 목소리를 모두 덮어버리고서는 나치즘과 더불어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악’으로 타락했다(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장은 두 ‘악의 이념’ 간의 대결이나 다름없었던 독일-소련 전선이었다는 점은 인상적인 아이러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 후로 냉전이 이어졌지만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조직의 보전을 위해서만 작동하게 된 스탈린주의는 결국 자기모순 끝에 무너지며 냉전 체제는 끝을 고했고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의 거대한 라이벌은 사라졌고, 소련은 수많은 나라들로 해체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반세기 동안 자신의 앞에 서 있던 강대한 라이벌이 왜 그토록 빠르게 몰락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 하에서 냉전 기간 동안 쌓아올려진 군비들과 자유진영 국가들 각지의 공장에서 쏟아져 나온 물질들에 둘러싸인 미국 사회에는 스스로를 다스리는 지침이 될 수 있을 만한 새로운 정신적 가치를 탐구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이겼으니까 우리가 옳았다’는 단편적인 인식 속에서 사방에 쌓인 재화들은 이미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자기증식을 시작하고 있었고 이 시점에서 미국이, 그리고 미국인이 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넘쳐나는 재화를 소모하고, 소모하고, 또 소모하는 것. 그래서 재화를 낳는 자본주의의 자기증식을 끝없이 가속시키는 것. 고도화된 현대 사회 가운데서 필요 이상으로 나무를 베어내고, 필요 이상으로 땅을 파헤치고, 필요 이상으로 많은 물건들을 만들어내고, 필요 이상으로 그것들을 빠르게 소모해 버린다. 그러한 ‘식욕’이야말로 미국인들의 무의식이 찾은 해답이었다. 클라이브 바커의 이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이 나라의 아버지들’은 이 지점에서 단순히 인육을 탐하는 식인 괴물들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일종의 심볼이 된다.
…아주 독특하다고 할 만한 특징은 없었다. 카우프만 자신처럼 팔이 두 개,
다리도 두 개였다. 머리가 이상하게 생긴 것도 아니었다. 몸은 왜소했고, 열
차로 기어오르는 것이 힘에 겨운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정신병자라기보다는
노인병 환자 같았다. 수세기 동안 소설에 등장해온 식인 괴물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 형체가 가련할 정도로 허약했다… (중략). …그들은 머
리칼이 한 올도 없었다. 피곤에 절은 얼굴 피부가 두상을 꽉 잡아당기고 있어서
팽팽한 긴장감이 전해졌다. 그들의 피부에서는 부패와 질병의 흔적이 역력했고,
광대뼈나 관자놀이 곳곳에서 검은 고름이 흘렀다. 일부는 아기처럼 발가벗고
있었는데, 매독에 걸린 것처럼 축축한 몸에서 성적인 매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가슴은 상반신에 가죽 자루처럼 늘어져 있었고 생식기는 쪼그라들어
있었다….
카우프만은, 아무 것도 모르는 시민들을 살해해 그 인육을 바침으로써 ‘이 나라의 아버지들’에게 봉사하는 살인마 마호가니와의 사투 끝에 뉴욕 지하철 깊은 곳에 도달하고, 비쩍 마르고 앙상하며 굶주려 있는, 도저히 인간이라고 부르기 힘든 ‘이 나라의 아버지들’과 마주한다(주 1*). 그들은 카우프만 앞에서 “너만큼이나 우리도 혐오스럽지만 이걸 먹지 않으면 우린 죽는다. 우리도 이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군침을 흘리며 마호가니가 죽인 이들의 시체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도시의 아버지들이고 어머니들이며 딸이고 아들, 도시의 시조이며 법의 제정자’임을 자부하는 이들이 경외감이나 위대함을 느끼기에는 너무나도 연약하고 추한 존재라는 점이다. 공포를 느끼기에는 너무도 기괴하고 추악하여 일말의 연민마저도 느껴지는 이들의 굶주림은, 소련의 해체 이후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새로운 적을 찾아 헤매던, 그러나 내면으로는 불안에 차 방황하던 미국의 그것과도 닮아 있다. 그리고 그 ‘이 나라의 아버지들’이 숭배하는 존재-이 작품에서는 ‘파사마쿼디 인디언, 혹은 샤이엔 족보다 앞서서 이 땅에 살았던 미국인의 시조’로 묘사되며 카우프만의 의식 너머, 훨씬 더 깊고 오래된 자아 속에 자리하고 있는 신적 존재-, 일종의 집단무의식적인 ‘신’을 대면한 카우프만은 영원히 변해 버린다. 인간의 내장기관처럼 파이프와 전선, 녹슨 철로가 어지러이 깔려 있는 도시의 내면에서 그는 새로 태어난다. 그리고 그 변모는 독자로 하여금 경외감과 혐오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2)애완동물 공동묘지
이 작품은 주인공 루이스와 그의 아내, 두 아이,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로 이뤄진 가족이 한가로운 교외의 저택으로 이사를 오고, 이웃에 살던 친절한 노인 저드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얼핏 보기엔 아름답고 평화로운 전원주택’, ‘그 주택과 그 주변에 감도는 불길한 분위기’ ‘친절하지만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이웃’ 같은 이러한 요소들은 숱한 미국산 호러 작품들의 전형적인 클리셰이며, 거기에다가 새로 이사 온 집 근처에 무언가 꺼림칙하고 이질적인 장소가 도사리고 있고 그 장소로 인해 ‘변모’가 일어난다는 플롯은 수많은 호러 영화와 소설, 드라마 등에서 재생산되어 왔다. 그러나 스티븐 킹은 거장답게 그러한 클리셰들의 묶음에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루이스는, 의사라는 안정된 직업과 단란한 가정을 갖춘 한 집안의 가장이다. 아름다운 아내 레이첼과 영리한 딸 엘리, 귀여운 아들 게이지, 그리고 고양이 처칠로 이뤄진 그의 가족은 더없이 행복한-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국 중산층의 판타지를 반영하고 있다. 루이스의 마음속에서 그늘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근처의 공장에 드나드는 대형 트럭들이 집 바로 앞의 도로를 자주 오가는 바람에 누군가가 다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과, 그 자신은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딸 엘리가 아끼기 때문에 처칠에게 싫은 내색을 하지 못한다는 것 정도에 불과하다.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던 장인 장모와의 관계도 막내 게이지가 태어난 이후 호전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어린 시절 지켜본 언니 젤다의 죽음으로 인해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를 병적으로 두려워하며 아이들에게도 죽음이나 죽음을 연상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교육도 시키려고 하지 않는 레이첼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의사 루이스는 종종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그것도 작품의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내내 비교적 사소한 의견차이 정도로 묘사된다-루이스의 이러한 면모는, 이사를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저드의 안내로 근처의 아이들이 죽은 애완동물을 묻는 애완동물 공동묘지에 갔다 온 이후 꾸준히 강조된다-. 루이스 일가는 이웃의 노인 저드와도 게이지가 벌에 쏘였을 때 저드가 도와준 것을 계기로 가까워지며, 저드 역시 아내 노마가 심장발작을 일으켰을 때 루이스가 도와준 이후 루이스 일가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연다. 특히 아버지를 일찍 여읜 루이스에게 있어 현명하고 친절한 저드는 좋은 유사 아버지가 되어준다. 그러나 작품의 절반 가까운 분량을 할애하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공들여 쌓아올려진 이러한 평탄하고 따뜻한 분위기는, 레이첼이 엘리와 게이지를 데리고서 루이스를 남기고 친정으로 추수감사절 휴가를 떠난 도중 고양이 처칠이 갑자기 죽으면서 급전한다.
엘리가 실망할 것을 생각하고 고민하던 루이스는 저드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저드는 오랜 옛날 이 지역에 살던 원주민 부족인 믹맥 부족의 전설 속에 전해지던 늪의 매장지로 루이스를 안내한다. 전에 갔다 온 바 있는, 아름답지만 어딘가 스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애완동물 공동묘지를 지나서 숲 깊은 곳에 있는 이 매장지로 가면서 저드는 루이스에게 ‘죽은 이를 이곳에 묻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살아 돌아오기에, 믹맥 부족민들은 고대부터 이 늪을 성스러운 땅인 동시에 공포의 땅으로 여겨왔다’는 전설을 들려준다. 이 부분의 묘사에 있어 킹은, 저드 역시도 이 매장지에 대한 공포심을 갖고 있으며 그 기묘한 힘을 사용하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기면서도 아들처럼 여기는 루이스를 위해 그 비밀을 알려준다는 것을 확실히 한다. 사이가 끈끈한 아버지와 아들이 으레 그러하듯, 둘은 아내(어머니)나 딸(여자 형제)과는 공유할 수 없는 둘만의 비밀을 갖게 된다. 믹맥 부족의 매장지로 죽은 처칠을 묻으러 가던 중, 저드는 루이스에게 말한다. “약간 죽은 것 같아. 이미 죽은 것이지만…. 얼마간… 그리고 다시 되돌아오지. 늘 그런 건 아냐. 이제 자네 딸은 아무 것도 알 필요가 없어. 고양이가 차에 치인 것도, 죽은 것도, 그리고 되살아난 것도 말일세.” 고양이 처칠은, 그렇게 해서 되살아난다. 중성화 수술 이후로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고 얌전해져 엘리의 걱정을 사던 처칠은 집 주변의 까마귀를 잡아 그 목을 잘라내고 내장을 파헤쳐서는 아무렇게나 던져둘 정도로 흉포해지고, 몸 주변에는 늘 무언가가 썩는 듯한 악취가 뒤따른다. 그토록 처칠을 좋아하던 엘리도 처칠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바뀌어’ 버렸다는 걸 감지하고 불안해한다. 그리고 이 부활로 인해 서서히 고조되기 시작하는- 지금까지는 루이스 일가의 단란한 일상 주변에서 그 검은 망토 자락 정도만 흘깃 비치던 불길함과 음습함은 두터운 먹구름처럼 확장되어 텍스트 전체를 뒤덮는다. 그리고 루이스가 내내 꺼림칙해하던, 집 앞의 고속도로에서 어린 막내 게이지가 트럭에 치어 죽는 것을 눈앞에서 보게 되는 것을 계기로 그 먹구름은 천둥을 가득 품고 으르렁대기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공포는 언뜻 읽으면 단지 친밀한 가족의 죽음과 그에 대한 슬픔과 상실감으로부터 비롯하는 것만으로 여겨지기 쉬우나, 꼼꼼하게 텍스트를 읽어보면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견지해오던 루이스가 게이지의 장례식 뒤 결국 무너져서는 게이지가 앞으로 순조롭게 자랐다면 성취해낼 일, 실패할 일, 기뻐할 일, 슬퍼할 일들을 상상하다가 현실로 돌아와서는 절망하다가를 반복하다,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불합리하다고 일소에 붙였을 행위를 온갖 자기합리화와 더불어 시도하게 되는 부분의 심리 묘사는 절절하기 그지없지만 이 작품은 그 정도 선에서 멈추지 않는다. 루이스는 레이첼과 엘리를 외가로 보내고서는 무덤에서 게이지의 시신을 파내어 매장지로 향한다. 전에 그 매장지로 처칠을 묻으러 갈 때도 느꼈던 알 수 없는 불길한 공기로 가득 찬- 현실과 비현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영역으로 발걸음을 내딛으며 루이스는 자욱한 안개 너머 저 멀리의 숲을 배회하는 ‘그 무언가’을 목격한다. ‘그 무언가’의 정체가 명확히 무엇인지는 작중에서 끝내 설명되지 않는다. 그에 대해 루이스는 이렇게 생각할 뿐이다.
…하느님, 아니지. 하느님이 아니야. 이것들은 그리스도보다 훨씬 이전의
것이야. 사람들은 시대마다 다른 이름으로 그것을 불렀지만, 내 생각엔
레이첼의 언니가 그에게 가장 걸맞는 이름을 붙여줬지. 위디한 오즈의
마벗사(주 2*) 땅 위에 남겨진 죽은 것들의 신, 하수구에 남아 있는 썩은 꽃들
의 신, 수수께끼의 신….
작중에서는 그저 ‘웬디고’(주 3*)라고만 불리는,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적인(혹은 악마적인) 존재에 대한 묘사는 많지 않다. 다만 루이스가 게이지를 되살리려고 할 것을 예감하고는 매장지에 대한 알려준 것을 후회하며 루이스를 말려야겠다고 생각하는 저드에게 최면과도 비슷한 암시를 심어 결국 그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게 한 수수께끼의 ‘이끌림’의 원천도 그 존재고, 레이첼이 어린 시절 언니 젤다를 간호하면서 간접적으로 느꼈던 ‘죽음 이후에서 기다리는 것’도 바로 그 존재라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 작품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커다란 미지인 ‘죽음’을 인간과 그 존재 사이의 연결고리로 놓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대단히 심오한 두려움을 이끌어낸다. 바로 이것이 「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과는 비슷하면서도 크게 다른 점이다. 「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에서 카우프만이 마호가니와의 사투라는 통과 의례를 거쳐서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는 규명하거나 정의할 수 없는- 개인적 기억의 범주를 넘어서 보편적인 인간 존재의 영혼에 자리하고 있는 집단 무의식적인 ‘신’과 대면함으로써 변모하는 것과 비슷하게, 한 차례 죽었다가 믹맥 매장지에 묻혀서 되살아난 것과의 접촉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친 루이스는 먼발치에서 잠시나마 그 존재를 보는 것으로 두 번 다시 예전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미국에서 호러 장르의 가장 핵심적인 타겟은 기독교(특히 칼뱅파 개신교)를 믿는 중산층 가정의 앵글로 색슨계 백인들이다. 이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빈곤에서 벗어나 문화생활을 영위할 경제력과 심적 여유를 갖고 있고, 이는 곧 독자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동시에 그 두려움으로부터 짜릿한 쾌감을 느끼게끔 해야 한다-즉, 독자가 두려움을 오락의 일환으로 즐길 수 있을 만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어필할 수 있다는 호러 장르의 본질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흔히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라고 일컬어지는 이들 계층은 미국 건국 이래 내내 미국 사회의 핵심을 형성해 왔으며 오랜 세월 지배 계층의 대명사처럼 여겨져 왔으나,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독일계와 아일랜드 계, 유태 계 이민자들의 증가 추세에 이어서 흑인 민권 운동이 사회 각층에서 결실을 거두고, 특히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히스패닉 계 인구가 급증하면서 점차 지배적인 위치를 내려놓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은 ‘미국적 가치, 미국적 사고방식’을 지지하는 보수적인 계층이며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구성하는 근간으로써 그 영향력은 미국 문화의 디테일한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표방하는 ‘미국적 가치와 사고방식’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요체가 바로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 떠받쳐지는 가족애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주인공 루이스로 상징되는 그들은 오랜 세월 신성시해왔던 가족 간의 유대가 끝없이 뻗은 고속도로와 그 위를 질주하는 트레일러 트럭이라는 근대화와 산업화의 상징을 통해 붕괴되는 것, 그리고 그 빈자리에 ‘죽음 너머에서 기다리는 것’이며 전통적인 질서와 이성으로는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또아리를 트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3. 결언
상기의 분석을 통해, 「미드 나이트 미트 트레인」과 『애완동물 공동묘지』 두 소설이 미국인에 있어서 어떠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두 소설에서 추출할 수 있는 공포의 키워드는 각각 ‘굶주림’, 그리고 ‘가족 가치의 붕괴’라고 할 수 있다.
6. 25 전쟁 이후로, 한국 땅에는 빈곤과 공포가 가득했다.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면 보이는 것은 오직 폐허와 시체뿐이었고, 눈을 감으면 귓전에는 포성과 비명소리가 감돌았다. 일제의 40여 년에 걸친 식민 지배와 갑작스러운 해방, 그 혼란이 채 수습되기도 전에 벌어진 같은 민족 간의 참혹한 전쟁은 멀게는 고려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이전 한국 땅에 있어왔던, 그리고 국민들이 공유하고 있던 거의 모든 종류의 정신적인 가치 체계들을 포맷시켜 버렸다. 이 시기에 한국 국민들 일반의 의식 속에 자리 잡은 과거와의 연속성에 대한 단절감은 실로 엄청나다. 그리고 미국은 한국을 중국과 소련을 견제할 정치적, 사상적 방파제로 선택하고서는 수많은 지원을 행하는 한편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본격적으로 이식했다. 미국의 이러한 지원은 이후 이어진 개발 중심의 군사 독재, 베트남 파병을 대가로 한 추가 지원, 80년대에 찾아온 전 세계적인 경기 호황과 맞물려서 한국을 급속히 발전시켰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의식 구조는 이러한 양적인 압축 성장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했다. 북한에서는 안 그래도 무자비하던 스탈린주의가 더욱 더 타락한 끝에 결국은 공산주의조차도 아니게 되어 버린 그 무언가와, 그 무언가를 통해 공포와 폭력으로 국민들을 옭아매는 일종의 절대왕정 체제가 들어섰다. 한국 역시도 헌정 질서와 민주주의를 무시한 군사 정권이 장기화되며 경직된 반공 교육이 보편화되었다. 물론 한국의 군사 독재와 북한의 왕정 체제를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 한국은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민주주의 국가였고, 그러했기에 7~80년대에도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여성 운동과 환경 운동도 그 틈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한국인들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 이래로 이어진 반공 사상과 급격히 밀려든 물질적 풍요 사이에서 점차 정신적 기갈을 느끼기 시작했다. 바로 그 무렵, 미국에서 그러했듯이.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하고 문민정부를 열며 군사정권이 실질적으로 종결되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확보되었으나 역설적으로 그 시점 이후로 한국인들은 정신적, 초월적 가치에 대한 기갈을 심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이론에 의하면, 사람은 가장 낮은 단계인 최소한의 생존과 안전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종족 보전과 번식에 대한 욕구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그것이 어느 정도 충족되고 나면 인간적인 애정과 우정, 존경에 대한 사회적 욕구가 생기며 그것 역시 충족되고 난 뒤에는 사회적 인정과 존경에 대한 욕구로 이어지며 최종적으로는 자기완성과 삶의 보람이라는 자아실현의 욕구로 변하며 점차 고차원적이고 정신적인 수순을 밟아 나가게 된다. 그리고 IMF 구제 금융 체제가 한국인들의 집단 정서에 거대한 상처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 얼핏 보기에는 오직 국익과 경제라는 화두에만 모든 국력을 집중시켜야만 할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굶주림’은 여전히 한국인의 내면에 남아 있다. 몇 년 전 마이클 섈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서점가를 휩쓸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불과 작년에 한국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화두가 되었던 키워드는 ‘힐링(Healing)’이었다. 2014년 현재, 한국 사회는 이에 대한, 스스로도 무엇을 먹어야 해결될지 알 수 없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가족 가치의 붕괴 역시도 한국 사회에서 공히 드러난다. 조선 시대 이래로 한국 사회는 농경문화와 유교적 질서에 근거한 대가족 사회였다. 농사를 짓기 위해선 일손이 많이 필요했고, 가부장을 대표로 하는 남성적 위계를 중심축으로 하여 가족의 구성원들은 생산력과 더불어 소속감을 얻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의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향하며 이러한 농경 위주의 사회상은 붕괴되었다. 1차 산업에 종사하는 농어민과 생산 및 기술, 관리직에 종사하는 도시민 간의 경제적·환경적 격차가 벌어지면서 ‘양복을 입고 출근해 빌딩 속에서 서류 다발을 껴안고 일하는 건 현대적이고 세련됐지만 햇볕 아래서 흙투성이가 되어 김매기와 모내기를 하거나 그물을 꿰매는 건 촌스럽다’는 식의 인식 역시도 확산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7~80년대 이후로도 면면히 이어져서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과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명절이나 제사 때문에 1년에 서너 번 가량 찾는 것을 제외하면 얼굴 보기도 힘든 아들 딸’이라는 모습은 한국 사회의 익숙한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형제자매들도 나이가 들어 결혼하고 나면 왕래가 뜸해진다. 90년대 이후로는 조기 유학 열풍이 불며 ‘기러기 아빠’의 수가 급증했고, IMF 이후 잠시 귀농 현상이 사회적 트렌드가 되기도 했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2000년 대 이후부터는 다문화 가정이 한국 가족 문화의 새로운 한 축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촌향도의 와중에도 시골에 남아 농업이나 어업, 임업에 종사하는 청년층은 소수 나마 있었고, 귀농을 통해 시골로 돌아온 경우도 있었다. 앞서 언급한 이러한 ‘시골 사람’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 의식이나 실질적인 경제 및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해 이들은 결혼 적령기를 지나서도 배우자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경제적으로 한국에 비해 낙후된 편인 동남아 출신 여성들과 국제결혼을 하곤 했다. 이러한 국제결혼 초기에는 남성 쪽은 아이를 낳아 일손을 늘리기 위해, 여성 쪽은 고향에 비해 부유한 한국 남성과 결혼해 가족에게 송금을 하기 위해서라는 매매혼적 성격이 강하고 언어나 문화충돌, 주변 사람들의 편견 등으로 인해 화목한 가정을 꾸리지 못하는 경우가 흔했다. 2000년대 이후로 국제결혼의 폭이 넓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농어촌 지역의 성비 불균형과 한국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인종차별적 경향은 문제가 되고 있으며 이들의 2세가 한국 사회에서 자라나며 겪고 있는 사회적 장벽 역시 추후 한국이 풀어야 할 숙제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한 문제들은 사회 구조의 변화에 따른 필연적 현상으로 판단하는 게 합리적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더 이상 한국의 전통적인 가족 문화가 유지되고 있다고는 보기 힘들다. 그리고 2014년 지금의 한국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뺏어간다’거나 ‘한민족이 살아야 할 한국 땅에 베트남 인이나 몽골 인이나 조선족들이 넘쳐난다’는 식의 제노포비아가 사회 곳곳에서 대두하고 있다. 기존의 전통적 가족 가치가 사라지고 남는 빈자리, 한국은 단일민족 국가라는 민족주의적 자부심이 무너지고 남은 자리에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실체 없는 두려움이- 그리고 그 두려움에서 비롯한 공격성이 꿈틀대고 있다.
인류는 지구 상에서 지성과 자아를 지닌 유일한 종족으로서 ‘죽음 이후 인간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라는 원초적인 의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한발 더 나아가 ‘인간은 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종교와 철학을 발명해냈다. 현세에서의 물질적 기복에 그치지 않는, ‘가치’에 대한 탐구는 인간의 본성이자 인간이 만물의 영장임을 자임할 수 있게끔 하는 핵심 요소이며 그러한 탐구심이 충족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간은 의식적으로는 자각하지 못한다 해도 필연적으로 정신적 기갈을 느낀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 한국과 한국인은 그러한 기갈을 채울 온당한 ‘가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냉전 종식 이후로 새로운 적을 찾던 미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미국의 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은, 미국은 신대륙 북부 전역을 지배하고 개발할 ‘명백한 운명’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30년 뒤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한 것을 계기로 미국은 독립된 각 주의 연합체가 아닌 하나의 ‘미합중국’으로써 실질적인 제2의 건국을 맞이했다. 그리고 미국의 ‘명백한 운명’은 제국주의로 비화되어 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그 이후 조선에 이르렀다. 그리고 6. 25 전쟁과 그 이후 이어진 미국의 ‘세례’는 한국에서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은 분명 한국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그것이 어디까지나 국제 정세에서 비롯한 타산이었으며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색채를 서방 세계의 그것으로 채색하기 위함이었음은 명백하지만 그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성립된 미국과 한국 간의 갑을 관계에 있어 그를 보다 합리적이고 상호주의적인 방향으로 개선해야 할 필요는 명백하되 그 관계를 단절할 수는 없다. 그러한 한계 속에서 한국과 미국이 앞으로 무엇을 얼마나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사고 속에서 ‘미국은 은인의 나라이며 미국의 방식이 곧 한국이 따라야 할 방식’이라는, 일종의 충성과 경의를 바쳐야 할 모범적 대상이라는 믿음은 건재하다. 「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에서 미국인의 시조이며 인간의 시조로 나타나는 그 ‘신’은, 그리고 『애완동물 공동묘지』에서 ‘죽음 이후에서 기다리는 것’은, 지금 ‘한국의 아버지’가 되어 가고 있다. 바야흐로, 그리고 시나브로. 그것은 미국과 미국인이 자신들 내부에 있는 무언가로부터 느끼는 공포인 동시에, 한국인의 입장에서 그를 이 땅에 퍼뜨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미국에 대해 느끼는 공포이기도 하다.(*)
주 1:현실에서도 뉴욕의 지하철 노선은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장소로써, 오랜 세월 동안 확장과 개수를 거듭한 끝에 현재는 수십 년 동안 일한 역무원들도 폐쇄된 구간과 정거장들을 모두 파악하지 못하는 ‘도심 속의 오지’로 악명이 높다. 수많은 벌레와 쥐, 너구리, 고양이, 노숙자들이 상주하고 있으며, 평범한 시민들이 일하고 공부하고 놀고 먹고 자는 익숙한 ‘일상의 공간’에서 바로 몇 십 미터 아래에 아무도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는 이질적인 공간이 있다는 특이성으로 인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헐리웃 데뷔작 『미믹』을 비롯해 많은 호러 장르의 픽션들이 이 뉴욕 지하철 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 2:‘위대한 오즈의 마법사’. 이 문장을 썼을 당시의 젤다와 그를 지켜보는 레이첼이 정확한 맞춤법을 모르는 어린 아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일부러 철자를 틀리게 쓴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하게 이 작품의 영어 원제도 Pet cemetery가 아니라 Pet semetery로 되어 있다.
주 3:이 웬디고(Wendigo)라는 이름의 기원은 캐나다 원주민과 이누이트 족 사이에서 전해지는 전설 속의 식인 괴물로, 몰아치는 눈보라와 함께 설원 위를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는 속도로 뛰어다니면서 나무꾼이나 광부를 잡아먹는다고 전설에서는 말하고 있다. 민속학자들은 눈 덮인 겨울 산과 숲에 대한 공포가 형상화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이 작품에서는 단지 그 이름만을 빌어온 듯하다. 영국의 작가 앨저넌 블랙우드 역시, '인간의 이성과 지혜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 자체로 사악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말하는 인간성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초월적 존재'이며 '인간 문명과는 대치되는 자연의 화신'으로 해석하여 동명의 호러 소설을 쓴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