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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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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5.11
    어머니와 아침 먹다가
  2. 2011.10.10
    기묘한 꿈
  3. 2010.09.10
    어머니가 듣고 계신 설교를 곁귀로 잠시 들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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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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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9.03.27
    어젯밤을 기점으로,
  11. 2009.02.17
    김수환 추기경 선종
  12. 2008.11.20
    꿈을 꾸었다
  13. 2008.10.14
    시편 23장 1절~6절
  14. 2008.08.07
    예레미야 서 29장 21절, 그리고 계시록 19장 20절.
  15. 2008.07.26
    ........
  16. 2008.07.01
    시편 91장.
  17. 2008.06.21
    자유를 향한 길
  18. 2008.06.17
    청년 기도회 다녀오다. 3
  19. 2008.05.22
    시무룩. 2
  20. 2008.05.22
    메모-영지주의(Gnoticism)에 관해. 8
  21. 2008.05.19
    가장 혐오하는 종류의 인간.

우연히 동성애 이야기가 나왔다. 오바마 미 대통령이 동성 결혼 합법화를 추진 중이라더라, 레이디 가가가 동성 결혼 주례를 서기 위해 목사 안수를 받을 생각이라더라, 그런 이야기가 오가다가

 

어머니:주님이 가장 분노하시는 죄악이 동성끼리의 성애야, 그건 주님과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나:우왕ㅋ 저 몇 년 전에 학교에서 동성애 차별 반대 서명운동 주도했었는데 저 지옥갈 듯ㅋ

어머니:그 땐 잘못 생각할 수도 있지, 지금은 아니잖니?

나:아뇨 지금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머니:....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좀 무섭다 나는.

 

애초부터 남자와 여자끼리만 사랑할 수 있도록 정해져 있으며 동성 간의 사랑은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라는 게 기독교의 정통적인 관점이다. 아아, 문둥병자도 신에게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믿었던 시절이 있었지ㅋ

 

이성 간에도 '사랑'이라고 부르기 힘든 온갖 병적이고 뒤틀린 욕망의 형태가 존재한다. 강제성이나 폭력성이 없고 양쪽 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사랑이라면 동성애라고 해서 딱히 문제가 될 일은 아니다.

 

어쩌면 정말로 동성애가 '죄'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른 것에 대한' 단죄가 되었건 '애초에 동성을 사랑하도록 잘못 창조한' 책임이 되었건 신이 주관할 문제지 인간이 역병 환자 격리하듯 선 갈라놓고 차별할 일은 아니다. 

 

 

 

And
을 꿨다고 막 일어났을 때는 생각했는데... 별로 기묘할 것도 없구나.

어머니가 개신교로 개종하신지도 1년이 넘었다. 누나도 같이 다닌다. 천주교이실때도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개종하신 후에도 종종 나를 설득해서 함께 나가지 않겠냐고 말씀하시곤 한다. 일부 극단적인 성향의 개신교도들이 종종 벌리는 문제도 있거니와(워낙 눈에 띄기도 하고, 아무도 문제에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다 보니 이미 '일부'라고 하기도 힘들지만), '종교 조직' 자체에 대한 내 회의 때문에 늘 거절하고는 있지만.... 곁귀로나마 어머니가 들으시는 설교 내용을 좀 들어보니 정치성이 강한 대형 교회에 대한 비판 등 제법 옳은 말을 하기도 하고, 약간 조사를 해보니 그 교회 목사가 뭔가 문제가 될 만한 일을 저지른 적도 없길래... 나도 어머니나 누나한테 별 말을 하지 않는 편이다. 원론적으로 보자면 부패 가능성이 좀 더 낮을 뿐 천주교라고 해서 개신교보다 딱히 더 완성된 종교라고 할 수도 없고.

그 꿈 속에서, 난 어머니의 설득에 응해 교회에 나가 있었다. 의외로 설교도 들을 만하고, 분위기도 밝고 개방적인 편이라서 경계가 약간 느슨해져 있었는데, 예배가 끝날 때 쯤 해서 어머니가 오시더니 약간 주저하며 나한테 '교회 측에서 크고 신비로운 비밀을 알려주는 대신 후원금을 요구했는데 액수가 약간 많긴 하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셨다.

확 정신이 드는 느낌을 받고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정말로 그렇게 중요한 비밀이라면 돈으로 그걸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고 화를 내며 그대로 돌아나오던 중 잠에서 깼다.

어차피 꿈일 뿐이니 별 의미는 없지만....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뭐, 실제로 어머니가 나가는 교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꿈은 그냥 꿈이다. 하지만 나 자신이 그런 종류의 부패(특히 종교 조직의 부패)에 대해 얼마나 민감한지는 새삼 되새기게 되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그다지 정의롭거나 고결한 인간이 못 된다. 나는 많은 결점을 갖고 있으며, 일상에 있어서도 여러 사소한 잘못들을 저지른다. 하지만 권력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난 물러나고 싶지 않다. 난 이미 그렇게 살아본 적이 있고,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내가 여전히 스스로가 신을 섬긴다고 생각하면서도, 종교 조직에 속하지 않으려고 하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다.  

뭐.... 꿈에서 아무리 잘해봤자 의미 없는 거고,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또 뭐 있으려나. 기독당 창당 건이 최근 들어 영 눈에 거슬리는데, 안전한 모니터 뒤에서 키보드로 까는 건 동네 초딩도 한다. 뭔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데... 으음, 생각날 때까지 딴 일이나 할까.

PS=서울에선 불꽃놀이 축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분은... 뭐, 약혼자 분과 다녀오셨으려나ㅎ 뭐.... 행복하시겠지.

PS2=감기 걸리신 모양. 빨리 나으시라고 문자나 한 통 보낼까 잠깐 고민하다가... 불편하실 듯하고, 약혼자 분이 보게 되면 상황이 나빠질 듯해 관둬버렸다. 보냈다간 분명 다음 순간 후회했을 듯하다ㅋ
And
곁귀로 잠깐 들었던 것 뿐이긴 하지만, 주목할 만한 점이 2가지 있었다.

첫번째는,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재벌 교회의 폐단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었다. 불교가 그런 말썽을 일으킨 적은 없다, 차라리 스님들이 훨씬 더 낫다고 강변하는 내용이 우선 귀에 들어왔다. 말하고자 하는 바 자체는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지만, 불교에 대해 지나치게 이상화하여 접근한다는 인상이 강해서 전적으로는 신뢰하기 힘들다는 느낌이 앞섰다. 물론 그 목사님이 불교의 예를 드신 건 한기총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기형적 대형 교회 체계의 악습과 비교하여 그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부적절한 접근법이었다고 보인다. 물론 불교는 훌륭한 종교고, 수신과 절제, 자비를 말하는 그 교리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도 호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식의 판타지를 갖는 것은 결국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불교에 대해 별로 이해를 갖지 못한 신자들이 저 설교만 듣고 '불교는 성직자가 타락하는 경우가 없거나 극히 소수의 예외적인 경우로구나'라는 막연한 인식만을 가지고 있다가 역사적으로 불교라는 종교 안에서 나타난 악과 타락을 접하게 된다면 목사에 대해 불신하게 되는 정도를 떠나 신앙 자체를 회의하게 될 수 있다. 그것 자체는 사실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천주교에 비해 목회자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 강하고, 지금껏 유지해 온 목회자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성실성을 지키기 위해 그러한 사실 자체를 외면하게 될 수도 있다. 이 지점에서 그 신자는 맹목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맹목은 악을 낳는다.

반복된 회의와 성찰은 정-반-합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신앙을 성장시킨다. 그것은 항상 현재진행형이며, 멈추지 않음으로서 가치를 갖는다. 나의 '믿음'이 그런 식으로 자랐다. 부정적인 형태로는 물론 긍정적인 형태로라 해도, 사실과 동떨어진 인식은 언제나 결국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 목사님의 설교를 처음부터 주의깊게 들어본 건 아니지만, 일단 첫 인상은 썩 긍정적이지 못했다.

두번째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거듭된 강조였다. 사실 이 지상에 속한 인간의 삶은 한 순간에 지나치는 짧은 순간에 불과하며 진정한 신자이기 위해서는 이 지상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천주교와 개신교는 물론 동방 정교회를 포함하는 기독교 전반에서 공히 나타나는 사상이다. 그리고 세속적인 부와 권력을 탐하는 재벌 교회에 대한 강한 비판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고. 사실 신학적으로는 정말 경건한 목자다운 태도긴 한데... 개인적으로는 회의적이다.

인간이 이 지상에 속해 있는 존재인 이상, 적어도 죽을 때까지는 人間으로서 살아가는 게 온당한 이치가 아닐까. 무엇보다도, 지상에 속한 것들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은 지금 인간이 속한 채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어둠에 대한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될 수도 있다. 박정희의 압제를 피해 명동 성당으로 피신한 이들 앞에서 전경들을 막아선 채 그들을 꾸짖던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한 일이 무엇인가? 김용철 변호사를 삼성 공화국의 권위로부터 피신시키고 시민들과 함께 촛불을 들었던 정의구현 사제단 신부님들이 보여준 것이 무엇인가?


.........

일단 어머니가, 내가 걱정했던 것과 같은 망가지고 뒤틀린 형태의 개신교에서 '희망'을 발견하신 것 같지는 않다. 일단은 다행스럽다. 아무튼 그 설교하시는 목사님도...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00909023409562&p=hankooki

...이런 작자보다야 나아 보이고 말이지(ㅅㅂ 벌금 50만? 까구 있네, 장난하냐?)

하지만 지금의 이 세상은 '악'은 뚜렷하되 '선'은 희미한 곳이다. 여전히 약간은 우려스럽다, 후우.

 
And
개신교로 개종하실 모양이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마음의 평화를 발견했다고 하신다.

나는 반대할 권한이 없다. 나도 스스로를 천주교 신자라고는 여기지만 그것은 형식 상일 뿐, 내가 섬기는 신의 본질은 인간이 만든 교리 속에 우겨 넣을 수 없고 훨씬 멀고 심오한 데 있으며 따라서 굳이 '기독교'라는 형태의 종교 안에서만 구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정통 교리 상으로 보자면 그러한 내 사고방식은 확실히 독신 내지 이단이 맞다. 굳이 신학적 차원까지 가지 않더라도 불합리한 부분이 있고-.

개인적으로 개신교에 대해 부정적이긴 하지만 그것도 교리 자체 때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세속적인 이유에 의한 것이다. 2000년이 넘는 시간 속에서 전 세계로 영향력을 확장해 가는 동안 교황청을 정점으로 하는 일원화된 교단 체계를 유지해 온 천주교는 본질적으로 보수적이고 권위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성직자들의 교육 역시 검증된 절차를 통해 엄격히 이뤄지며, 서품을 받은 이후로는 중앙에서 개인적인 생활에 필요한 장소와 물품 등을 지원해 주고 교회 건물의 유지보수 등도 중앙에서 담당하기 때문에 성직자들의 개인적인 타락이나 외도가 어렵다-적어도 금전적으로는-.
 
그러나 개신교는 다르다. 개신교는 만민 사제론을 따르며, 천주교처럼 중앙집권적이지 않다. 그 방식에 있어서도 목사 개인의 인품과 설교 능력 등을 통해 신도들을 유치해 교세를 유지하고 확장하는 형태를 가지며, 천주교처럼 '중앙'이 지원해 주는 게 없다. 이러한 방법은 목사가 보다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형태로 교리를 해석할 수 있으며, 폐쇄적인 천주교에 비해 혁신이 이뤄질 여지가 많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목사로 하여금 '신도들을 신께 이끄는 목자'인 동시에 '교회 건물과 신자들을 관리하고 교세를 펼쳐야 할 세속적인 경영자'라는 상호 모순성 강한 위치에 서게 만든다. 그리고 후자로 무게추가 기울어질 가능성이 대단히 높으며, 개인적으로는 그 경우의 해악이 천주교의 교리적 보수성-낙태 반대와 동성애 금지로 주로 나타나는-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어머니의 결정에 대해 반대할 권리가 없다. 스스로가 진정한 천주교 신자라고 하기는 어려운 입장이며, 타 종교에도 구원의 여지가 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현실적으로도 개신교라고 해서 전부 저 악명 높은 순복음 교회를 비롯해 '명백히 타락한' 교회들 뿐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 마음 속 한 구석에서 위화감이 떠나질 않는다.
   

And
인간과 인간, 이상과 이상, 꿈과 꿈, 욕망과 욕망, 그 모든 것들이 '세계'라는 하나의 거대한 악보 위를 수놓은 음표들이라면,

神은, 그 음표들 사이의 공백에 거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개인이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무언가-특히 다른 인간-와의 '관계맺음'를 통하여 인간은 人間다워진다. 마치, 현악기의 현들이 저마다 모두 홀로 고독하게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떨림이 화음을 이루어 음악을 빚어내는 것처럼.

......


나라는 음표 주변에 있는 다른 음표들 중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요즘 자주 받는다. 설령 아니라 해도, 나는 그것을 끝내 알지 못하리라는 느낌이 든다.

신의를 나눌 수 있으리라 여긴 친구는 잃어 버렸다. 절조를 바치고자 한 이는 떠나 버렸다. 내게 남은 것은 나 자신을 위한 명예 뿐이다. 그 '명예'도 하나의 음표일 수 있다면, 내 주변에 있는 음표는 오직 그것 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와 그 '명예' 사이의 공백에는 神이 존재한다. 그것이 내가 神을 떠나거나 버리는 게 불가능한 이유다.

...
....
......
........

오랜만에, 사랑했던 분의 꿈을 꿨다. 내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거냐고 묻자, 그 분은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고 웃으면서 답했다.

그 분이 그립다.

And
http://happylog.naver.com/freedom/post/PostView.nhn?bbs_seq=18016&artcl_no=123460038037

흥미로운 논의들이 많다. 새로 알게 된 사실들도 있고.
And
정경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명백한 이단이다. 나는 형식적으로는 가톨릭 신자지만, 바티칸을 정점으로 하는 교단 체계와 몇천 년에 걸쳐 가다듬어져 온 신학과 교리보다는 내가 섬기는 신과 그 신을 섬기는 나 자신 간의 개인적인 연결을 더 중시한다. 그러한 내 신앙의 형태를 바꿀 생각도 없고,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 나와 같은 방식으로 신을 받아 들이라고 요구할 생각도 결코 없지만, 나의 신앙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항상 마음에 두고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는 별도로 나는 속(俗)의 세계와 성(聖)의 세계를 철저히 구분하며, 성의 세계에 속하는 나의 신앙은 내 안에서 오롯하며 순수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동시에 속의 세계에 속해 있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문제는 인간이 해결해야 할 뿐 신에게 구원을 빌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나는 신을 사랑한다. 더 없이, 간절히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인간으로서의 고통이나 회한들을 해결해달라고 신에게 빌 수는 없다. 그것들은 속의 세계에 속한 것이며, 어디까지나 인간인 나 자신이 숱하게 고민하고 실패를 겪고 노력해가며 바꿔나가야 할 문제다.

나 역시도 지금까지의 삶 속에서 여러 일들을 겪으며, 너무도 힘겹다고 기도를 올린 적은 몇 번인가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신이 해결해 주기를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몇 번이고 실패하고, 슬퍼하고, 힘겹게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도, 단 한 번도.

그것이 내 신앙의 형태다.

그것을 잃어 버린다면, 나는 내가 그토록 혐오하는 '자신이 지금 여기서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외면하고 신의 이름만 헛되이 부르짖는 짓' '신을 전일 근무 가능한 무보수 만능하인으로 취급하는 짓' '사리사욕의 추구를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 하는 짓'을 저지르는 자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만다. 내 신앙이 잘못된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두렵지 않다. 내가 진정으로 두려워 하는 건, 내가 혐오하는 자들처럼 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신에게 구원을 빌 수는 없더라도, 인간으로서의 고통은 여전히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며 힘겨운 선택에 직면했을 때도 오직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건 마찬가지라 해도, 최소한 그것이 슬프고 힘겹다는 걸 인정하고, 그를 신에게 털어 놓는 것 정도는... 좀 더 자주 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좀 더 신에게 의존해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내가 혐오하는 자들처럼 될 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


      
And

가끔은 생각한다. 나 역시도 '광신도'일지도 모른다고. 거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며 단군상 목을 베고 장승을 찍어내는 이들과 동류일지도 모른다고.

다만 나의 광신은, 다른 종교를 공격하거나 비신자들을 상대로 전도를 하는 등 '외부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인 교세 확장을 거부하고 공존을 중시하거나 기독교 내부의 부패와 타락을 공격하는 등 '내부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전에도 썼다시피, 나의 신앙은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성격의 것이며 성경의 글귀와 신학적 사유보다는 개인적인 양심과 세계관에 입각해 있다. 그렇기에 개인적인 차원에서라도 옛날 기독교가 신의 이름으로 행한 악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관련 지식을 모으고, '전국의 사찰이 무너지게 해주소서' 운운하는 먹사들을 죽어라 깐다. 내가 그들을 경멸하는 이유는 단순히 사회적으로 해악을 뿌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의 영광을 더럽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나는 답할 수 없는 의문에 이른다. '나 역시도 신의 뜻을 재단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그들을 공격함에 있어서 종교의 언어를 사용해도 되는 것인가?' 한발 더 나아가, '나 역시 자신의 신앙의 형태를 객관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단지 개인적인 경험들에 근거하여 믿을 뿐인데, 이 역시 본질적으로는 그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광신이 아닌가?'
 
나의 태도가 '잘못되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어쨌든 나의 신앙은 적어도 내 안에서 진실하며, 먹사들을 비롯한 타락한 성직자들이나 극단적 근본주의자들의 행태는 종교적인 관점을 떠나서 사회악이 맞고 지탄받아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런 나 자신을 움직이는 근원, 나 자신도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내 안의 본질이 일종의 '맹목'이 아닐까 하는 의문은 떨치기 힘들다.  

And
토~일요일 이틀간 성령 피정을 다녀왔다.

일정 중에 못 옮기기라는 행사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살아오며 자신이 받아온 상처를 떠올리며, 접시에 담긴 못을 한줌 집어서 바깥으로 옮겨 놓는 것이었다. 도중에 못이 아닌 뭔가 큼직한 금속 조각이 손에 닿았는데... 다른 게 섞여 들어갔거니 하고는 별로 신경쓰지 않고 못을 집어서 접시 바깥에 놔 두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못을 집어 내고, 접시에 가득 담겨 있던 못들이 줄어들자 아까 그 금속 조각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까는 존재를 알지 못했던 십자가 하나가 못들 사이에 묻혀 있었다.

내 못들이 담긴 접시를 모두 비워 내려면, 앞으로 또 얼마나 더 견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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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더 이상 '내가 잃어버린 것들, 가질 수도 있던 것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내게 다가올 것들, 가질 수도 있을 것들'을 위해 기도하기로 했다.

난 내 내부에서 일어났던 한번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지금도 난 여전히 지상에 묶인 인간이며, 앞으로 내게 남겨진 날들도 결코 밝지만은 않을 것이다. 실패도 겪고, 후회도 하고, 좌절할 날도 가끔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속한, 인간의 행사일 것이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Amen.

 
And
http://cardinalkim.catholic.or.kr/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339222.html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한 가족인 김수환 추기경님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인에게는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므로 주님 안에서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을 가집시다. 이제 우리 곁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님을 위하여 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세상에서 불러 가신 김수환 추기경을 받아들이시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시며,
성인들과 함께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형제 여러분,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말씀을 들으십시오. 5장 24절에서 29절의 말씀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저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아버지, 오늘 저희가 한데 모여 세상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을 위하여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를 베푸시어 이 세상에서 주님을 바라고 믿었던 김수환 추기경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성인들과 함께 영원한 안식과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또한 주님을 믿는 모든 이가 주님을 소리 높여 찬미하고 영원한 기쁨 속에 다시 모일 때까지 서로 위로하며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주님, 김수환 추기경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김수환 추기경과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와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기도합시다.
언제나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하느님, 오늘 이 세상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을 기억하시어 사탄의 손에 넘기지 마시고 거룩한 천사들에게 고향 낙원으로 데려가게 하소서.
김수환 추기경은 세상에서 주님을 바라고 믿었사오니 지옥 벌을 면하고 영원한 기쁨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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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그 꿈 속에서, 거대한 빛이 내게 물었다.

너무도 힘드냐고. 더 이상 견딜 수 없냐고. 그렇다면, 내가 너를 불러 올리겠다고.

난 대답했다.

내겐, 아직 남겨진 미련이 있다고.


그러나... 꿈에서 깨어난 다음엔, 그 미련이 무엇인지... 내가 진정으로 욕망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

자는 동안, 첫눈이 내렸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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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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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블로그 동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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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이번 성령 피정에 내가 '꼭' 참가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것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내키면 갈 수 있는 것이고.


하지만 내가 이번에 내키지 않는 이유는, 어머니가 이번 학기 복학 여부를 거기서 생각해 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복학을 하느냐 마느냐 같은 건 어디까지나 '속(俗)'의 문제다. 그러나 어머니는 속의 문제를 '성(聖)'의 방식으로 풀 것을 요구하신다. 효도하는 셈치고 '네 갈게요' 할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이건 내가 종교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라는 중요한 문제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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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2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5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6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7 천인이 네 곁에서,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8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9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10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11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13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14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15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6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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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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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절대적이고 완전한 자유라는 개념을 믿지 않은 지 오래됐었다. 무한한 자유라는 것은 무한한 구속이라는 것과 같다. 이 세계를 명징하게 알고, 자신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상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자유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어떠한 자유도 없는가?

인간은 살아가면서 다른 인간과 끝없이 교류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상처받으며 살아간다. 그 모든 경험은 개인에게 있어 진실한 것이되, 그는 어디까지나 그 개인에게 있어 그러할 뿐 다른 인간에게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저마다 속한 환경과 입장이라는 큰 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그 틀은 각 개인마다 모두 다르기에 그 진실은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 육체가 정신을 구속하고, 언어가 사유를 규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자유는, 다만 자신이 속한 현실- 만인에게 공평하게 냉혹한 우주에 속한 채, 영원히 고독할 수 밖에 없는 개인이라는 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자신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가를 두고 벌이는 투쟁이 고작이라고 믿었다.
     
근대 기독교 교리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자유 의지다. 신은 인간이 선할 것을 바라되, 많은 것을 겪고 배우고 생각한 인간이 종국에는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써 선을 택해야만 비로소 가치가 있기에 악을 선택할 자유 역시 주었다는 게 그것이다. 다만 악을 택한 인간은 최후 심판의 그 날에 단죄받을 것이다. 그것은 무한히 선하고 인자한 신이 창조한 우주에 왜 이토록이나 많은 악과 슬픔, 허무가 횡행하는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내가 다시 신을 찾은지도 꽤 여러 해가 지났다. 신을 철저히 부정하고 혐오하던 시절의 기억에 비추어 스스로를 돌아봤을 때... 지난 몇 년 간 항상 해오던 자문, 내게 과연 그 '투쟁에의 자유'가 있는가에 대한 답은... 일차적으로는 긍정이다.

내가 무언가 심각한 불법-이를테면 살인 같은-을 저지른다고 가정하자. 난 물론 잡혀서 인간의 법에 따라 재판 받을 것이고, 죄에 따른 응분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난 나의 행동이 크나큰 죄악임을 알며, 그 형벌을 순순히 감내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별도로, 그 불법이 오랜 기간의 숙고와 고민 끝에 내려진 결정- 사고나 우발적인 이유에 의한 게 아니라 나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였다면 나의 내면에서 그에 대한 고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 난 나의 양심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

그게 스스로를 향한 그 의문에 대해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긍정하는 이유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거꾸로 하면,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친 방대한 사유와 내적 갈등이라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구속'이 요구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자유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해 아는 것은 반쯤 포기한 상태다. 다만 아직도 포기할 수 없는 의문은, 과연 내가 가질 수 있는 자유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가, 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난, 내 안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욕구가 일순간의 충동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내게 주어진 자유의 일부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이미,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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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달 쯤 전부터, 차로 20분 가량의 거리에 있는 성당에서 매주 화요일 저녁마다 하는 청년 기도회에 나가고 있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성당 안 가는 것까진 뭐라 안 할테니 여기에라도 나가봐라'는 말씀 때문에 가기 시작했지만... 어느덧 익숙해졌다.

신께 물었다. 지금의 이 모든 고통, 이 모든 번민들은 내 '인간'으로서의 자의식이 너무 크기 때문이냐고. 섬기는 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나 역시도 당신께 모든 걸 맡기고 모든 것을 당신께로 돌려야 하는 거냐고.

그 기도로 얻은 답은 그러했다.

그러한 고통마저도 내가 너에게 허락한 자유라고. 너의 그 인간으로서의 자의식이 그토록 크다면, 마음껏 번민하고 회의해 보라고.

난 신께 물었다. 그마저도 당신의 안배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그 가없는 탄식은 무엇으로 보상받아야 하느냐고.

신께선 답하셨다.

때가 머지 않았으니, 그 때가 오면 모든 걸 이해하리라고. 너의 희생을 잘 알고 있으니, 그 때가 오면 네가 포기해야 했던 모든 것들은 봄처럼 돌아오리라고.

다만, 난 너를 사랑한다고.

주여,
인간으로서 이룰 수 있는 바는 인간인 채로 이루겠다는 저의 오만마저도 당신은 인정한다는 것입니까.

그러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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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다퉜다.

나의 어머니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나를 성당으로 이끈 것도 어머니였고.

객관적으로 봐서 어머니는 신앙을 핑계로 가족들을 고생시키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스스로의 신앙심과 가족 안에서 지켜야 할 책무 간에 균형을 잡을 줄 아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자'다. 그러나 개인적인 경험들 때문에 오랫동안 신앙을 버렸다가 비교적 최근에야 다시 신을 찾은 나와는 여러 면에서 마찰이 많은 편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은 대운하 반대 걷기 캠페인을 떠났던 분들이 서울로 돌아오는 날이고,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가 있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있어 이번 주 토요일은 또한 성당에서 주최하는 성령 세미나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좀... 다퉜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그런 건 다음에도 갈 수 있으니 성령 세미나에 가라고 하시고, 나는 나대로 집회에 나갈 일이 없어져야 정상이다, 내게는 이게 더 중요한 일이라고 맞섰다.

결국 어머니는 감기로 고생하시면서도 오늘 밤 철야 기도를 하러 나가셨다. 난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어머니 말씀대로 하겠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난 외아들인데, 휴우.

난 내 결정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도로 어머니께는 좀 죄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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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는, 그리스도 사후 신학계 최대의 화두였던 선악의 일원성 대 이원성이라는 두 가지 상이한 신학적 관점 중 후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의문- 신이 무한히 선하고 인자하다면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이 무수한 '악'들은 어디에 기원을 두고 있는가. 이 세계에서 명백히 실존하고 있는 악에 대해 신은 책임이 없는가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숱한 신학자들이 여기에 매달렸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초대 교회가 세워지고, 그 영향력이 유태 지방은 물론 그리스 쪽으로도 뻗어 나가면서 초기 기독교는 신 플라톤 철학과 만났다. 인간이 인지 가능한 물질 세계는 모두 현상을 초월한 완전한 관념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데아 이론과 기독교 교리가 만나면서 영지주의는 구체적인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당시의 신 플라톤 주의자들의 이론은 이렇다: 태초에 완벽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일자'가 있다. 형상으로 가득찬 우주가 되기를 원한 '일자'는 마치 태양이 빛과 열을 발하듯이 자신을 방사하여 '존재'를 유출한다. 인간이 말하는 신은 바로 이 '존재'다. '존재'는 다시 '누우스(정신)'를 유출한다. 존재론적 우위와 도덕적 우위를 동일시했던 그들은 누우스까지는 '일자'가 욕망한 우주의 완성에 기여하는 것이기에 선하긴 하되, 이러한 유출이 거듭될수록 그 완전성은 열화되어 간다고 보았다. '누우스'가 자신의 존재를 생각함으로써 '프시케'가 만들어졌다(삼위일체 교리에서 성부가 자신의 존재를 생각함으로써 성자가 생기는 것과 같다). 그리고 프시케는 최종적인 유출물인 질료에 이데아와 물리적 형상을 새겨서 이 물질 세계를 창조해 냈다.

당시의 신학자들 일반은 이 세계에 횡행하는 악의 존재를 부정하자니 너무 비현실적이고, 긍정하자니 신의 선함을 부정해야 한다는 아이러니에 직면해 있었다. 모든 것이 신의 피조물이라는 성경의 문구는 너무 명확했고, 학자들은 신이 창조한 것들 중에 '악'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논증해야 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학자 바실리데스가 그 때까지 '신앙보다는 지식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하나의 학문적 태도에 불과했던 영지주의를 이데아 이론과 결합하여 본격화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계가 본질적으로 악하며 천하다고 믿었다. 이 세계는 사탄의 것이라는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가르침과도 비슷한 면이 있지만, 영지주의자들은 무한히 선한 신이 이러한 악한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그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영지주의자들은, 신보다는 못하지만 큰 힘을 가고 있으며 사악한 의지를 가진 '무언가'가 물질세계와 인류를 창조했다고 믿었다. 2세기의 영지주의자 마르키온은 이 '무언가'에 사탄의 칭호를 부여했고,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정의롭지만 너무도 엄격하고 가혹한 신을 사탄이며 물질세계의 창조자로 규정했다.

2세기 이집트의 영지주의자인 발렌티누스는 마르키온의 이론을 승계하여 악을 설명하는 최종적인 정의를 내렸다: 악은 신 이후로 유출이 거듭되며 완전성이 열화됨으로써 생긴 형이상학적 결과로 처음 생겨났다. 이 유출의 끝에 '아카모스'가 있었고, 아카모스는 구약의 신-즉 사탄-을 생성했다. 사탄은 물질을 통해 인간의 육체를 만들었고, 따라서 이 물질 세계에 속한 인간은 물리적으로 사악하다. 그리고 영혼 본연대로라면 선해야 할 인간이 마음과 육체를 통해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자신의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생긴 도덕적 결과를 통해 우리가 말하는 '악'은 이 세계에서 실체를 얻었다.

영지주의 내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발렌티누스 학파가 구약의 신을 사탄이라고 보아 구약의 내용을 대부분(혹은 완전히) 부정하고, 완전히 선하고 순결한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도 물질적인 육체를 가지지 않고 대신 인간 비슷해 보이는 형상을 임시로 두른 채 지상에 왔다 갔다는 이론(가현설이라고 부른다)을 정립함으로써, 영지주의는 정통 기독교계로부터 완전히 이단으로 규정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공인 이후 급속히 힘을 얻은 기독교는 탄압당하던 지하 종교의 위치에서 벗어나 지배자와 권력자의 종교가 되었고, 이단에 대한 물리적인 박해도 가능할 수 있을 정도로 커진다. 그렇게 커진 기독교의 압박과, 지금까지 너무도 많은 신화와 전승을 외부로부터 차용해 온 나머지 생기기 시작한 내부적인 모순(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존재론과 도덕의 동일시라던지)이 격화된 결과 영지주의는 4세기 경 명맥이 끊어진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치며 기독교 교리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성직자의 금욕주의나 순결주의 확립에 그 흔적이 크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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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linkid=4&articleid=2008051819455715170&newssetid=1352

난 천주교 신자다.

한 때 나는 더 없이 순수한 열망으로 신을 섬겼었고, 한 때는 철저하게 신을 부정하고 증오했으며, 지금은 다시 신에게 돌아왔다. 내가 신앙을 회복하기까지는 16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들을 모두 거친 지금, 나는 내가 신을 섬기고 있음을 조용한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있다.

난 인정한다. 나의 신앙은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성격의 것이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성격의 것이 아님을. 나의 신앙은 성경의 글귀와 신학적인 사유보다는 나의 사적인 양심과 세계를 보는 관점에 입각해 있음을.

나의 내면에서 그 신앙은 아무런 모순도 없이 오롯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에게만 유효한 방식일 뿐 남에게도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 법이고.

그러나 저 설교를 한 자로 대표되는 이들은 오직 하나의 방식을 만인에게 적용하려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신의 이름을 걸고 장사를 하고 있다.

저들이 차라리 "이단에게 파멸을" "땅끝까지 복음을"이라고만 외쳤다면 난 그들을 이토록 혐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종류의 맹목은 남들에게 가혹한 만큼 스스로에게 있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가혹함을 수반한다. 비록 '악'일 망정, 그것은 그 순결함에 있어 일말의 진정성을 갖는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단순히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서 뼛속까지 혐오하는 이유는, 그들 자신은 어떠한 희생도 치르려고 하지 않은 채 수 많은 신자들을 오도하며 그를 통해 세속적인 부와 권력을 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의 영광을 더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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