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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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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까지 도서관에 있다 집으로 돌아온 뒤, 혼자 거실에서 술 마시면서 중얼중얼 기도 겸 술주정을 했다. 대강 내용은.... '시발 주님 제게 바라는 게 뭐에여' '요즘 제가 엇나가는 꼴이 썩 보기 좋지 않으실 거라는 건 아는데, (아마도 나쁜 의도는 그러시는 건 아니겠지만) 원래는 제가 지금까지 겪은 것보다 더 실패를 겪고 좌절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해야 하는데 안 그러고 있어서 보기가 안 좋으신 건지 아니면 이제 고난의 시간은 얼추 끝나가는데 PTSD에 시달리는 베트남전 귀환병마냥 웅크리고 있어서 그러신 건지 모르겠음' '대체 내 인간으로서의 삶, 인간으로서 가진 신념, 인간으로서의 명예는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거임' 등등등.

 

알고 있다. 이 지상에 인간이 거의 70억이 다되가는데, 神이 그 중 한 명의 칭얼댐을 일일이 듣고 신경써야 한다는 건 불합리하다.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일망정, 神께선 아마도 인간을 사랑하실 것이다. 그리고 난 인간이다. 무엇보다도, 神은 다만 그 자체로 경외받아야할 존재이지 인간의 셔틀질 따위나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리 만무하고. 神이 인간의 만족(특히 세속적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닌 한, 내가 겪어온 개인적인 불행들 때문에 '신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다. 절조는 잃었고, 신의는 깨졌지만 아직 명예만은 남아 있다. 흔들리는 나 자신과, 변함 없이 빛나는 내 '명예' 사이의 공백에는 神이 존재한다. 그것이 내가 神을 완전히 떠날 수 없는 이유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지독하게 우울하거나 화가 나는 날에는 기도를 하며 불평불만도 좀 늘어놓고 싶은 건 사실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좀 하소연을 하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대놓고 투덜댄다-_- 어젯밤에도 그렇게하다.... "제게 주어진 잔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겟세마네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적어도 당신의 독생자셨지만 전 70억 인간 중 하나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로 마무리하고 잠들었었다. 그리고 꿈을 꿨다.

 

깨고서 몇 시간이 지난 지금은 급속도로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긴 한데... 일단 비교적 뚜렷하게 기억나는 건 2가지 정도다.

 

1)인간 비슷한 두 형체가 내 앞에 서 있었다. 한 쪽은 왠지 모르게 위엄 있는 노인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그 노인의 왼 편에 있는 쪽은 좀 더 젊고 기운찬 장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어쩌면 神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전에 몇 번 느낀 적 있는 초월적인 경외감은 이번에는 들지 않았다). 노인 같은 느낌이 드는 쪽에 상처가 아프다고 호소하자 그 쪽은 도자기로 된 작은 약병 같은 걸 내게 건네주었다. 그걸 받아든 채 내가 그간 견뎌야했던 고통을 상기하며 "이 잔, 제게서 거둬 주시면 안 됩니까?"고 묻자 그 쪽은 "그렇게 하라."라고 즉시 대답했고, 동시에 나는 내 안에서 무언가가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두 형체가 떠나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자, 나는 그 둘을 급히 불러세워서는 방금의 그 노인 같은 쪽에게 "잠시만요, 좀 더 시간을 두고 결정해보고 싶습니다." 라고 부탁했고 난 다시 내 안에 무언가가 깃드는 느낌을 받았다-그 전에, 왠지 약간 망설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2)어머니를 만났다. 하지만 겉모습만 어머니를 닮았을 뿐 사실은 다른 그 무언가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내게 말한 내용을.... 기억나는 한도 내에서 적어보자면 이렇다. "너의 운명은 신에게 속해 있다. 그를 거부하고 바깥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하면 너는 언제까지나 방황을 거듭할 것이고 이렇다할 성취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신에게 모든 것을 맡겨라. 전에 만난, 예지의 은총을 가진 수녀님이 너를 두고 그리 말하셨다."

 

깨고 난 뒤, 멍하니 앉아서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 모든 운명들이 오직 신에게 속한 것이라면 내 인간으로서의 신념, 자존, 의지, 자의식, 그것들은 어떤 의미가 있지? 눈꺼풀 안쪽에 신의 영광을 새기고서 그 눈꺼풀을 꿰메어 버리라는 요구와 이것이 뭐가 다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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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머리가 좀 차가워진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말 그대로 하찮은 꿈일 뿐 어떤 종류의 계시 따위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참이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