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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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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포스트 제목은 드립이고...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사임 발표 이후,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봐도 말라키의 환시와 관련짓는 글들이 여럿 보인다. 저 예언 자체는 몇 년 전부터 돌던 거였는데, 나도 이런 분야의 음모론이나 예언 같은 것에 관심이 있는 편이라(믿지는 않는다, 다만 재미 있으니+소설 소재로 괜찮은 게 많아서 이것 저것 찾아볼 뿐) 알고는 있었지만 별로 신경은 쓰지 않았는데 이번엔 솔직히 좀 움찔했다(...) 피우스 10세 전 교황이 "마지막 교황이 자리에서 내려올 때 사제들의 시신을 밟으며 바티칸을 떠나야 하는 모습"을 환시로 보았다고 이야기한 것도 생각나고, 파티마의 마지막 예언 떡밥도 떠오르고.

 

 

머리가 좀 차가워진 지금 생각해 보면 역시 인류 멸망 어쩌고는 지나치게 오버고.... 일단 말라키의 환시 마지막 부분은 익히 알려진대로, "로마의 베드로가 마지막 목자가 될 것이며 그의 양떼들을 많은 환란 가운데서 먹이게 될 것이다. 그 후 일곱 언덕의 도시가 무너져 내릴 것이며, 무서운 심판자가 그의 백성들을 심판하리라." 라는 귀절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신임 교황 후보로 지목되는 추기경의 이름이 '베드로'를 영어 식으로 읽은 Peter이며 일곱 언덕의 도시는 로마를 가르킨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웹을 좀 더 돌아보니 마지막 교황이 될 '로마의 베드로'가 고유 숫자가 주어져 있지 않으니(비오 6세, 요한 바오로 2세라는 식으로)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의 적통을 잇는 진정한 '교황'이 아니라 세속적인 정치력을 통해 지명된 가톨릭의 '수장'일 뿐이며 그로 인해 가톨릭 최후의 날이 도래할 것이라는 해석도 보인다. 그런가하면 저 마지막 구절은 다만 객관적 상황만을 묘사한 것일 뿐 그가 무슨 거짓 예언자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하는 건 너무 멀리 나간 거라는 해석도 있고. 환단고기랑 엮는 해석도 있더라-_- 찾지는 못했지만 마지막 교황이 사실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친구도 있을 거 같다, 그러고 보니 전대갈도 가톨릭 세례명이 베드로였지(........)

 

 

그리고 내가 보기엔 그런 건 다 가당찮은 소리다. 당장 역사적으로만 봐도 동 시대에 세 명씩 교황이 존재하며 서로를 이단으로 지목하고 파문 선고를 내린 막장 시절도 있었고, 막장 분야의 레전드로 길이길이 손꼽히는 알렉산더 6세 같은 케이스도 있다. 신께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지상에 스스로의 영광을 드러낸다. 가톨릭 교회도 다만 신의 여러 도구 중 하나일 뿐이며, 교황 역시도 '베드로의 적통을 이어받은 하늘 열쇠의 수호자' 같은 게 아니라 인간들이 모여 세운 종교 조직의 수장일 뿐이다. 가끔 기도 드리며 불평도 하고 화를 낼 때도 있지만........ 어...... 음...-_-... 난 신은 믿지만 종교는 믿지 않는 입장으로써, 적어도 아직까지는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방식일망정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싶고, 알렉산더 6세나 그 아들내미 같은 친구들이 진정한 사제라면 존내 눙밀이 처흐를 거 같다(...)

 

 

굳이 억지로 신비주의적 해석을 하지 못할 건 없긴 한데... 만일 정말 말라키의 환시 그대로 가서, 가톨릭 교회가 종말을 맞이하고 '무서운 심판자'의 집행이 이뤄져서는 남은 성직자들이 수많은 교파로 갈라져 이합집산한 끝에 결국 완전히 사라진다 해도 내게는 별 의미는 되지 못한다.

 

하지만 한 때나마 스스로를 가톨릭 신자라고 규정했고, 지금도 일종의 버릇 비슷하게 꼬박꼬박 식사 전 기도를 하고 가끔 성경도 꺼내 읽는 입장에서.... 이래저래 꽤나 복잡한 감상이 들긴 할 것 같다...

 

사임 연설 직후 성 베드로 대성당에 떨어졌다는 낙뢰. 사진 멋있다...:Q

 

PS=내가 오컬트나 음모론 같은 걸 좀 좋아하긴 하는데, 그래도 이번 일을 두고 인류 멸망 어쩌구로는 도저히 연결을 못 시키겠다. 말라키 대주교는 중세인이었고, 당시 중세 유럽인의 사고방식으로서는 가톨릭의 종말이 곧 세계의 멸망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시대에 거기서 살았다면 나라고 해서 달랐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거야 그 때 사람들 관점이고.... 정말로 이게 인류 멸망 내지 세계 종말로 이어진다면 오늘 낮에 잠깐 낮잠 잤을 때 내 꿈에 나타나서 엄청 시무룩해 보이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하고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무튼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수염난 아저씨가 예수 그리스도고, 내가 봤던 풍경들이 천국의 모습이겠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마도 '멸망'은 보통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대로... 전쟁이 되었건 환경 격변이 되었건 운석 충돌이 되었건, 그런 물리적인 형태로 오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무언가 거대한 '변화'를 가져올 일종의 '특이점'이 오고 있다는 막연한 예감은 든다. 그 변화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그치겠지만, 아주 거대한 격변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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