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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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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명백한 이단이다. 나는 형식적으로는 가톨릭 신자지만, 바티칸을 정점으로 하는 교단 체계와 몇천 년에 걸쳐 가다듬어져 온 신학과 교리보다는 내가 섬기는 신과 그 신을 섬기는 나 자신 간의 개인적인 연결을 더 중시한다. 그러한 내 신앙의 형태를 바꿀 생각도 없고,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 나와 같은 방식으로 신을 받아 들이라고 요구할 생각도 결코 없지만, 나의 신앙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항상 마음에 두고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는 별도로 나는 속(俗)의 세계와 성(聖)의 세계를 철저히 구분하며, 성의 세계에 속하는 나의 신앙은 내 안에서 오롯하며 순수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동시에 속의 세계에 속해 있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문제는 인간이 해결해야 할 뿐 신에게 구원을 빌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나는 신을 사랑한다. 더 없이, 간절히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인간으로서의 고통이나 회한들을 해결해달라고 신에게 빌 수는 없다. 그것들은 속의 세계에 속한 것이며, 어디까지나 인간인 나 자신이 숱하게 고민하고 실패를 겪고 노력해가며 바꿔나가야 할 문제다.

나 역시도 지금까지의 삶 속에서 여러 일들을 겪으며, 너무도 힘겹다고 기도를 올린 적은 몇 번인가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신이 해결해 주기를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몇 번이고 실패하고, 슬퍼하고, 힘겹게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도, 단 한 번도.

그것이 내 신앙의 형태다.

그것을 잃어 버린다면, 나는 내가 그토록 혐오하는 '자신이 지금 여기서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외면하고 신의 이름만 헛되이 부르짖는 짓' '신을 전일 근무 가능한 무보수 만능하인으로 취급하는 짓' '사리사욕의 추구를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 하는 짓'을 저지르는 자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만다. 내 신앙이 잘못된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두렵지 않다. 내가 진정으로 두려워 하는 건, 내가 혐오하는 자들처럼 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신에게 구원을 빌 수는 없더라도, 인간으로서의 고통은 여전히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며 힘겨운 선택에 직면했을 때도 오직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건 마찬가지라 해도, 최소한 그것이 슬프고 힘겹다는 걸 인정하고, 그를 신에게 털어 놓는 것 정도는... 좀 더 자주 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좀 더 신에게 의존해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내가 혐오하는 자들처럼 될 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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