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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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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도 소설(특히 폴라리스 랩소디를 거쳐 눈마새, 피마새)에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관념은 니체식 허무주의다. 니체의 허무주의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원래 철학이란 게 이런 식으로 요약하면 안 되는 거긴 한데).


1)이 세상에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2)보편적으로 '위대하다'거나 '고귀하다'거나 '선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것 역시 외부의 권위에 입각한 것이기에 허무주의자는 적극적으로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

3)개인이 철저하게 자신의 자유 의지로 '나에게 의미가 있다' '내 욕망의 대상이다'라고 결정한 제일가치만이 유일하게 중요하다

4)도덕이 되었건 종교가 되었건 사회적 합의가 되었건 모든 종류의 관념적 권위(그의 저서에서 신, 우상이라고 계속 비유하는 그것)를 완전히 무시하고 오직 자신이 제일가치로 삼은 그 무언가를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 인간이 바로 초인(위버멘쉬)이며, 모든 인간은 그러한 초인을 지향해야 한다

5)초인이 발견한 자신의 제일가치가 결과적으로 기존의 도덕이나 진리와 비슷할 수는 있어도 그저 권위에 맹종해서 그걸 따르는 것과 초인이 주체성을 갖고 제일가치라고 판단해서 따르는 건 완전히 다르다  

6)각자의 제일가치가 충돌하는 두 초인이 만나면 높은 확률로 한 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산 쪽은 계속 살아서 자신의 제일가치를 추구할 수 있으므로 좋고 죽은 쪽도 죽음을 통해 자신의 제일가치가 그만큼 의미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했으므로 


결과적으로 허무주의자(특히 니체식 허무주의자)는 극한의 개인주의자가 된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제일가치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지만(물론 타인을 존중하기 때문에 강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제일가치는 오직 그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이 자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특히 신이나 도덕, 전통, 충성 등을 이유 삼아 그렇게 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한다. 그리고 그 제일가치를 위해 남에게 위해를 가해야만 한다면 거리끼지 않고 그를 행한다.  


폴랩의 경우, 데스필드가 '사람들은 정의를 위해서 한 일이라고 말하는 건 좋아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한 일이라고 말하는 건 꺼려한다, 그런 건 불한당의 화법이라고 여긴다'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상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라고 읽을 수 있는 장면이다. 휘리 노이에스 역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내내 괴로워하다가 파킨슨 신부와의 고해성사, 율리아나 공주와의 만남을 거치며 그러한 컴플렉스와 죄의식에서 해방되어(니체 식으로 표현하자면 노예의 도덕을 벗어나) 주체적으로 자신의 군사적 재능-증오하는 아버지의 유산이라고 생각했기에 그 동안 억눌러 온-을 마음껏 발휘하게 된다. 눈마새의 주퀘도 사르마크가 갈로텍에게 하는 "도덕을 요구하는 나약한 것들의 천박한 투정 따위 무시해. 그것들은 도구인 도덕을 삶의 목적으로 만들고 삶을 도덕의 도구로 바꾸지."라는 조언에서 그러한 주제가 특히 두드러진다.


 그러한 니체식 허무주의가 싫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영도의 소설들을 꼼꼼하게 읽어 보면 이영도 스스로가 작가로서 그러한 허무주의를 긍정 내지 옹호한다고 볼 수 없다. 그의 소설 대부분이 허무주의에 기반하고 있으며 허무주의자 캐릭터들도 다수 등장하지만 그 중 특정 캐릭터가 이영도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근거는 없다. 드래곤 라자부터 피마새(약간 확장해서 보자면 오버 더 시리즈의 첫 작품인 오버 더 호라이즌도)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에서 내내 가장 직접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한 초인의 위대한 여정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교류와 이해, 변화의 중요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교류와 이해, 변화가 다만 긍정적으로만 묘사되지 않는다는 것, 피마새에 이르러선 작품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전쟁 장면을 통해 그러한 '교류와 이해, 변화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부정적인 면면'들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독자를 마음 편하게 하는 일차원적 해피 엔딩'으로 결말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 이영도의 독보적인 점이다. 


만일 이영도가 그런 작가였다면 퓨처워커의 미 그라시엘(주연급 캐릭터 중 하나로서 많은 비중과 매력적인 캐릭터성으로 독자의 인기를 얻기에 충분한 캐릭터)은 자신의 비참한 미래를 알면서 세상의 시간을 지속시키기 위해 그를 담담히 받아 들이는 대신 어떤 식으로든 미래가 바뀌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캐릭터가 되었을 테고, 눈마새의 케이건도 작품 최후반 나가에 대한 증오를 버린 이후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묘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영도는 그렇게 하는 대신 쳉이 (돌아온다 해도 함께 오랫동안 행복하지는 못할) 미를 기다리며 오두막을 짓는 모습, 폴라리스가 멸망하는 모습, 나무가 되어 버린 륜의 모습을 독자에게 보여줌으로써 깊은 여운을 남긴다. 새 시리즈를 벗어나, 이영도의 작품세계 한 축을 지탱하기도 하는 오버 더 시리즈의 주인공 티르 스트라이크는 허무주의를 배격하는 인물이기도 하고(오버 더 호라이즌에서 티르와 루레인이 대화하며 티르가 "그 때문에 사람이 죽습니다, 그런 악기는 입다물어야 합니다"라고 단언하는 장면을 상기하라). 


그러한 철학이 이야기 내에서 자연스럽게 형상화되지 않았다는 관점에서 이영도의 소설을 비판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하지만 '이영도가 같은 주제만 반복한다'는 식의 비판은 동의하기 어렵다. 그가 내내 하고 있는 주제는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것은 평생을 바쳐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미흡했던 드래곤 라자부터 시작해 피마새에 이르기까지 내내 그가 다루는 세계는 넓어지고 있다. 


이영도 비평 관련해서는 거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영도의 문장력도 높게 평가하는 편이다. 눈마새를 거쳐 피마새로 오면서 점차 건조해지는 경향이 있지만 퓨처워커나 폴랩에서는 굉장히 시적이고 유려한 미문들이 많다. 피마새의 전쟁 묘사는 그 반대로 지극히 담담하고 건조하다. 그토록 메마르게 온갖 참상을 독자의 하트에 직격으로 쏟아 부을 수 있는 작가는 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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