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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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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제:호러물에서 공포감을 유발하는 핵심 요소는 '공포의 대상과 교감할 수 없을 것' '공포의 대상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그리고 '공포의 대상에 대해 저항할 수 없을 것' 이 3가지다. 그런데 대체로 중세 판타지 물에서는.... 대상이 오크나 오거, 트롤 같은 비교적 흔한 몬스터가 됐건 마법이 됐건 거기에 관한 설명이 세계 속에서 너무 많고, 또 주인공들이 그걸 알아낼 수 있을 만한 루트도 너무 많다. 현자가 설명충 짓을 해주건, 마법대학 도서관을 뒤지건, 다른 모험가들에게 이야기를 듣건.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은 무섭지가 않음. 물론 그 대상이 존내 강할 수도 있고, 그 스펙을 통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는 줄 수 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그 대상은 그 세계 내부에서 객관적인 분석과 연구가 가능한 구체적인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상태기 때문에 이런 건 너무 빨리 익숙해지게 됨.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는가?
 
1)'오크' '오거' '레이쓰' '스펙터' '뱀파이어' 같은 잘 알려진... 이 바닥에선 일반명사 취급되는 이름을 쓰지 말 것. 대신 외모와 행동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그냥 주인공들이 임의로 가칭을 붙여서 부르게 할 것.
 
2)몬스터의 경우, 디테일을 바꿀 것. 예를 들어서 뱀파이어 같은 경우... 햇빛을 받으면 재가 된다는 설정이 워낙 유명하고, 여기저기서 마르고 닳도록 쓰였지만 정작 가장 대중적인 뱀파이어 이미지의 원천인 브람 스토커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드라큘라 백작은 햇빛 받아도 안 죽었다. 낮에는 그저 관에서 자고 있으며, 자는 중에도 주변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묘사 뿐이고. 머리를 굴리면 해당 개념의 핵심 컨셉을 유지하면서도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음.
 
3)마법의 경우, 모든 마법 주문이 뭔가 희생 의식이 필요하다거나 주문의 효과 자체가 흑마법 삘이 난다거나하게 설정할 것.그리고 모든 주문에 대해 완전히 예측할 수 없는 부작용을 붙일 것. 이 부작용은 뭔가 음산하고 섬뜩하고 기분 나쁠수록 좋다(주문을 쓸 때마다 검은 개나 까마귀가 어디선가 나타나 기분 나쁘게 마법사를 쳐다보다 어느새 사라진다거나, 쓰고 나면 그날 밤 반드시 악몽에 시달리게 된다거나, 점점 외모가 추하게 변한다거나). D&D 식으로 표현하자면, 모든 와일드 서지가 뭔가 칙칙하고 공포 분위기가 나도록 바뀐 와일드 메이지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중세 판타지 세상인 이상 마법사가 한 둘이 아닐테고, 그런 부작용에 대해 연구하고 왜 그런 부작용이 생기는지, 어떻게 하면 부작용을 없애거나 완화할 수 있는지 연구한 사람들도 한 둘이 아닐테지만 아무도 그걸 확실히 밝혀내지 못했다고 해둘 것. 그리고 이런 요소들을 통하여 마법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그 진정한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 누구도 완전히 알 수 없다고 못 박아둘 것. 마법은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힘이고, 원래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종류의 힘이라는 걸 명확히 할 것. D&D 기반이라면 아케인 스펠이 거의 다 이 분류에 들어갈 듯?
 
4)신의 힘을 빌리는 성직자의 신성 마법 같은 경우, 저런 종류의 부작용은 없다고 해도 됨. 대신 그 어떤 훌륭한 성직자도 지금 자신이 사용하는 주문이 정말로 자신이 섬기는 신의 은총인지 아니면 대악마나 악신이 일시적으로 힘을 빌려주며 자신을 조종하려고 하는 것인지 결코 완전히 확신할 수 없다고 못 박아둘 것. 기도 등을 통해 신과 직접적으로 소통하거나 하는 종류의 마법 주문은 전부 금지.
 
5)세상의 전반적인 파워 레벨 자체를 낮게 잡을 것. 이해하게 쉽게 D&D 기반으로 쓴다고 가정할 경우... 주인공들은 그래도 유능해야 쓰기도 쉽고 보는 입장에서도 답답하지 않으니 대략 3레벨 정도. 3레벨이면 D&D의 표준 배경세계 세팅인 그레이호크 기준으로 상당한 경험과 훈련과정을 거친 베테랑들이다. 전사라면 혼자서 칼 한 자루 들고 오거와도 맞장뜰 수 있고, 도둑이라면 도둑 길드의 하급 간부로서 시골 마을 하나 정도는 관리할 수 있고.... 등등. 그 대신, 상한선을 낮출 것. 너님이 지금 쓰고 있는 건 호러물이지 에픽 히어로물이 아닙니다.  

6)캐릭터들이 속해 살아가는 세상의 묘사도 어둡고 침울하고 질척질척해야 분위기가 산다. 왕궁에서는 한 때는 현명하고 자비롭게 나라를 다스렸지만 이젠 늙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왕이 있고, 그 왕을 둘러싸고 신료들이 수군수군하며 파워게임 벌이고 있고, 귀족 가문에서는 작위와 영지를 계승해야 할 첫째 아들이 전신에 털이 자라나며 성격이 난폭해지는 기묘한 병에 걸리는 바람에 그 소식이 가문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도시 광장에서는 이단심문관들이 마녀를 화형하고 있고, 그걸 지켜보는 평민들은 내일은 또 누가 잡혀갈까 혹시 이웃이 날 밀고하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뒷골목에선 재수 없는 행인이 칼침 맞아 죽어가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시골에서는 역병과 기근이 돌고.... 등등.  
 
7)주인공들도 정통적인 영웅이 아니라, 어딘가 엇나갔거나 뒤틀린, 병적인 부분이 있는 부분이 있는 캐릭터들인 쪽이 배경과도 자연스럽게 섞이고 스토리 속에서 움직이기도 좋음. 고결하고 이타적인 기사지만 미녀의 유혹에 극도로 약하다거나, 오랜 세월 전쟁터를 전전한 베테랑 전사지만 검으로는 벨 수 없는 유령 같은 존재를 무척 두려워한다거나, 강력한 마법사지만 더욱 강한 마력을 얻기 위해 몰래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거나, 경건하고 신실한 사제지만 독선적이고 오만한 면이 강하다거나, 쾌활하고 놀기 좋아하는 한량이지만 저주를 받아서 한 번 화가 나면 주체할 수 없어질 정도로 난폭해진다거나, 기타 등등. 
 

8)적으로 나오는 몬스터의 경우... 대전제에서 언급한 대로 '교감 불능' '이해 불능' '저항 불능'이라는 3대 요소를 극한까지 살리려면 2)에서 제시한대로 평범한 오크나 고블린 같은 놈들을 더 강하고 살벌하고 이질적으로 묘사하는 방법도 있지만 아무래도 역시 '이 세계에 속한, 비교적 평범한 생물체'라는 한계가 있다. 그런 면에서 가장 좋은 놈들은 역시 유령을 비롯한 언데드와 애초에 다른 세계 출신인 요정, 악마, 그리고 만든 마법사의 역량에 따라 유니크한 결과물이 나올 여지가 많은 골렘 및 키메라 종류. 역시 다른 세계 출신인 애버레이션 계열 몬스터들도 가능성이 높다. 성격을 좀 꼬아서 인간이 자기 기준의 선과 정의에 철저히 부합하지 않으면 대량학살도 거리끼지 않는 식의 극도로 독선적이고 오만하며 두려운 존재로 설정한다면 천사도 호러물의 몬스터로 등장시킬 만하다(그렇다고 해서 자기 입으로 "하찮고 천박한 인간" 운운하는 대사를 치면 깬다. 크툴루 신화의 고대신들이 "우매한 인간들 전부 죽어 버려라 크하하" 같은 소리를 하면 그 파워와는 별개로 얼마나 병신 같아 보이겠음? 어떤 의도도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만 한다거나, 자기 할 말만 할 뿐 유의미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처리할 것. '나름 자기 기준의 선과 정의에 따라 이런 짓을 하는 것 같긴 한데 하는 짓이 존내 끔찍한 데다가 인간 입장에선 그 기준이 뭔지 영 이해할 수 없다' 정도의 느낌을 받게 하는 걸로 충분함).


*참고할 만한 작품:블러드본(게임, 초반 한정), 더 위처(게임), 다키스트 던전(게임), 디아블로1(게임), 적사병의 가면(소설), 오트란토 성(소설), 슬리피 할로우(소설), 베르세르크(만화, 초반~중반 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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