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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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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에르는 굳이 표현하자면 안티 히어로다. 그는 진심으로 온갖 악마와 언데드와 몽환마와 기타 등등(...)으로부터 대륙 전체를 구하고 인류를 지켜내어, 궁극적으로는 대륙을 사람의 땅으로만들고자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 자신은 오만하고 냉혹하며 잔인한 남자다. 인류를 지키고 괴물들을 몰아낸다는 그 자신의 목적의식이 무엇보다도 확고하고, 그를 위해서는 실력 있는 인재들을 모아 곁에 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다른 PC들을 높게 평가하며 협력을 아끼지 않을 뿐이다. 다른 PC들이 무능했거나 대륙 구제라는 대의에서 벗어나는 이들이었다면 하비에르는 거리낌 없이 그들을 소모품으로 취급해 이용하고 그에 대해 어떤 죄책감도 갖지 않을 것이다. 소설이 아니라 TRPG, 다른 플레이어들에 대한 예의 문제+PC들끼리는 기본적으로 대등한 관계이기에 그렇게 캐릭터를 움직이지 않았을 뿐 하비에르 리베라라는 캐릭터 개인만 놓고 보자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러한 하비에르와 붙여 놓으면 가장 흥미로워지는 게,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똑똑하고 능력 있으면서도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파워게임에 능한 타입이다. 이렇게 되면 하비에르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제거해 버리기엔 만만치 않고, 할 수 있다 해도 능력이 너무도 아깝다. 같이 일하자니 자신의 위치를 위협한다. 그런 상황에서 하비에르는 정중하고 세련된 사교술로 상대를 대하는 동시에 상대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자신이 우위를 잡을 만한 여지(심리적 약점, 숨기고 싶어할 만한 과거사 등)가 있는지 파악하려고 할 것이다(NPC 중에선 도둑 길드 마스터와 지금 이런 상태다)

 

그 와중에서 그러한 밀고 당기기를 진심으로 즐기기도 하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상대보다 우월한 입장에 서려고 하며 도저히 완전히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면 최소한 상대 역시 자신을 일방적으로 누를 수 없는 위치에서 대등한 파트너십을 맺고자 할 것이다. 지금 다른 PC들 중 핵심적인 위치라고 할 수 있는 검객과 성전사는 이런 식으로 하비에르와 파트너십을 이루고, 그를 기반으로 한 동료애로 엮여 있다.  원래 초기 구상은 지금보다 훨씬 악랄하고 탐욕스런 인간이었지만(하비에르의 원래 모델은 악명 높은 콩키스타도르, 에르난 코르테스다. 그에 따라 하비에르의 초기 컨셉 역시도 최고급 정장을 입은 뱀이었다) 플레이 과정을 거치면서 순화된 것에 더해 캠페인 중반 무렵 세상을 위협하는 진정한 적의 실체를 보고 자신이 그를 막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각성하고 다른 PC들에게 동료애를 느끼게 된 결과가 지금 상태. 그래도 캠페인 초반에 궁지에 몰아넣은 적 NPC 입에 칼날을 쑤셔넣고 비웃는 장면이나 중반 무렵 적과 얽혀 있던 어린 소녀 NPC를 죽이려고 들었다가 다른 PC의 만류에 마지못해 포기하는 장면, 해적들을 토벌하면서 10분의 1형으로 자기들끼리 죽고 죽이게 강요하는 장면 등 꾸준히 하비에르는 근본적으로 사악하고 냉혈한 인간이다는 걸 염두에 두고 플레이하는 중. 플레이어 입장에서, 플레이 내에서 하비에르 리베라라는 캐릭터를 통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은 '배포 크고 도량 넓은, 품격을 아는 대악당'. 내 안의 피카레스크 로망을 극대화한 캐릭터다. 주사위 신도 그런 하비에르를 좋게 봤는지(....) 중요한 타이밍이다 싶을 때는 묘하게 주사위가 잘 나와주곤 해서 '하비에르는 악(惡)이 가호하는 남자'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능력적으로도 하비에르는 지금 PC들 중 가장 정치적인 두뇌가 뛰어나며 사회적 음모와 기만, 술수에 능통한 모사 스타일인 데다 더해 우월한 대외적 커리어와 재산, 사회적 연줄, 작전 입안 능력을 통해 다른 PC들이 활약하기 좋은 판을 깔아 주는 데에 특화되어 있다. 전투력도 다른 PC 중 검객과 성전사가 워낙 쩔다보니 좀 가리긴 하지만 꽤나 준수한 편이고(타격 ST포함 ST 19에 전투 반사신경, 고통에 강함, 무기의 달인 3종 세트를 다 갖고 있다). 인성적인 측면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악인+10대 시절 홀로 낯선 땅으로 건너 와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 운으로 화려한 명성을 쌓아 올린 자수성가형 모험가+뛰어난 두뇌를 가진 열정적인 야심가+유능한 인재를 좋아하고 가능한 옆에 두려는 경향+덤으로 새로운 것과 독특한 것에 대한 소년과 같은 탐구심과 모험심. 이러한 요소들이 하비에르 리베라라는 캐릭터를 정의하는 핵심 키워드다.

 

+

 

비록 지금 캠페인이 멈춰 있고 당시 마스터도 RPG 자체를 다시 할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태라서 재시작 여부도 기약이 없지만 반쯤 재미삼아서 정리하자면.... 하비에르의 진정한 목적은 상술한대로 '악마와 언데드와 몽환마와 기타등등으로부터 대륙과 사람들을 구하고, 수많은 적과 동료를 만들고, 대영웅 하비에르 리베라라는 불멸의 이름을 사람들의 마음에 남기는 것'이다. 플레이 당시 재미 삼아서 겸 캐릭터 어필을 위해 하비에르의 시점에서 쓴 일기를 팀 홈페이지에 업로드하곤 했는데, 그 일기에 '외칠 것이다, 검을 휘두를 것이다, 세상이 결코 나를 무시할 수 없도록 만들 것이다. 이 세상에 지워지지 않을 상흔을 남겨주겠다. 나는 하비에르 리베라다'라고 적었던 것이 그 표시다. '집착:권력을 얻는다(-10CP)'도 어디까지나 그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권력욕을 나타낸 것.  

 

캠페인 2기가 끝난 현재 시점에서 하비에르는 왕국의 권력 핵심부에도 꽤 많이 접근했지만, 스스로가 왕이 될 생각까지는 없다. 지금 왕국의 후계구도가 좀 불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찬탈 같은 거 하려 들었다간 적이 지나치게 많아지고, 그거 대응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전부 써야 한다. 플레이 외적으로도 그렇게 되면 하비에르 혼자 정치물을 찍게 되고 다른 파티원들과 같이 움직이기 힘들어진다. 하비에르에게 가장 이상적인 그림은 1)날라리 첫째 왕자보다는 유능하고 똑똑하지만 카리스마가 없고 게이라는 약점이 있는 둘째 왕자를 지원해서 왕위에 올리는 대신 그 과정에서 은혜를 입히고 약점을 잡아서 자신에게 터치하지 못하게 만들어놓고(플레이 당시 다른 팀원은 하비에르라면 첫째 왕자를 지원하고는 자신이 흑막이 되려고 하지 않겠냐고 이야기했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른 게, 첫째 왕자를 꼭두각시 왕으로 삼고 싶어하는 귀족들은 이미 충분히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비에르가 현대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자신과 성향이 더 비슷하지만 그만큼 라이벌도 많은 국힘당에 들어가기보다는 민주당에 들어갔을 것이다) 2)그와 동시에 자신은 고급정보를 쥐고 수많은 모험가 출신 특수요원들을 부릴 수 있는 특무대의 대장이 되어서, 그 위치에서 누릴 수 있는 권력과 정보력을 활용해 예의 진정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딱히 어두운 과거 같은 것 없는 타고난 악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그게 실 플레이를 방해하지 않고, 마스터와 다른 팀원들이 좋아해줄 만한 멋진 측면이 공존하기 위해선 그런 '잔인하고 교활하며 야심 넘치지만 나름의 대의가 있으며 그를 위해 먼저 나서서 행동하고 자기 사람은 아끼며 잘 대해주는 면도 있는 효웅'으로서의 면모가 명확해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능하다거나 적당한 명분을 붙여 족치고 빼앗기 좋다거나 뭐 그런 이유로 이용당한 뒤 죽을 NPC들에겐 띵복을 액션빔.          

 

+

 

하비에르를 위해선 개인 엔딩도 3개 정도 구상해놨었다. 명예욕에 미쳐서 폭주한 끝에 결국 완전히 타락해서 '영웅이 될 수 없다면 마왕이 되서라도 내 이름을 불멸로 만들겠다'는 생각에 결국 한 때 자신이 막으려고 했던 괴물이 되어 왕국을 공격하다가 옛 동료들에게 최후를 맞는 배드엔딩 1, 그 정도까지는 안 가지만 역시 권력욕에 사로잡혀 무리수를 두다가 그간의 악행이 드러나서 모든 걸 잃어 버리고 혼자 쓸쓸히 죽는 배드엔딩 2, 결국 원하던 걸 전부 이루고 부와 명성과 권력을 마음껏 누리다가 나이가 든 어느 날 지금껏 일궈낸 모든 걸 버리고 혼자서 대륙 북방의 미개척지로 새로운, 그리고 최후의 모험을 떠나는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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