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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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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내가 올려다본 그의 어깨는 까마득한 산처럼 높았다.
그는 젊고, 정열이 있었고,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나에게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내 키가 그보다 커진 것을 발견한 어느 날,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가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이 험한 세상에서 내가 살아나갈 길은
강자가 되는 것뿐이라고 그는 얘기했다.

난, 창공을 나는 새처럼 살 거라고 생각했다.
내 두 발로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라 내 날개 밑으로
스치는 바람 사이로 세상을 보리라 맹세했다.

내 남자로서의 생의 시작은 내 턱 밑의 수염이 나면서가 아니라
내 야망이, 내 자유가 꿈틀거림을 느끼면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가족에게 소외 받고, 돈벌어 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집안 어느 곳에서도 지금 그가 앉아 쉴 자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을 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이란 침묵뿐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아직 수줍다. 그들은 다정하게 뺨을 비비며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를 흉보던 그 모든 일들을 이제 내가 하고 있다.
스폰지에 잉크가 스며들 듯 그의 모습을 닮아 가는 나를 보며,
이미 내가 어른들의 나이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러나 처음 둥지를 떠나는 어린 새처럼 나는 아직도 모든 것이 두렵다.
언젠가 내가 가장이 된다는 것, 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무섭다. 이제야 그 의미를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그 두려움을 말해선 안된다는 것이 가장 무섭다.
이제 당신이 자유롭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나였음을 알 것 같다.

이제,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후에, 당신이 간 뒤에, 내 아들을 바라보게 될 쯤에야
이루어질까, 오늘밤 나는 몇 년만에 골목길을 따라 당신을
마중 나갈 것이다.
할 말은 길어진 그림자 뒤로 묻어둔 채
우리 두 사람은 세월 속으로 같이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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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분에 가까운 길이에, 오직 나레이션만으로 일관하고 있는-방송용으로는 도저히 틀 게 못 되고 라이브에서도 부담스러운 초유의 구성으로 당시 중학생이던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세상에 태어난 이후 최초로 만나는 '신적인 존재'다. 세상 누구보다도 강하고, 모든 걸 아는 초월적인 숭배의 대상(프로이트 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자신이 독점해야 할 어머니의 사랑을 뺏어 가며 자신의 남성성이 집약된 남근을 훨씬 더 큰 크기로 갖고 있는 경쟁자지만).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갖는 경외감은 나이가 들어가며 반항심으로 변하고, 더욱 나이가 들고 나면 동질감으로 변해간다. 화자가 자신 내면에서 발견하는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이 연민은, '아버지 살해'를 넘어선 세상의 모든 아들들에게 보편적으로 호소력을 갖는 근원적 정서다(페미니스트들은 마초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라고 비난하고, 그 비난도 전혀 설득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50년 후 내 모습>에서 신해철은 고독하게 홀로 살다 홀로 죽어가는 노인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발견하고는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뒤에 나온 넥스트 2집에 실린 이 곡에서 그는 아버지가 한 때 가졌던 권위의 몰락을 보고서 자신도 그리 되어가고 있음을, 그리고 가장이며 남편이며 아버지로 살아갈 자신의 멀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간 아내와 함께, 아이들과 함께 신해철은 人間으로서 행복했으리라 생각한다. 아마도 난 갖지 못할 그 행복을 마음껏 누렸을 것이다. 그 시간들이 두려움이 아닌 행복이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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